2002년부터 외부 반입 금지로 제주산만 먹어야
천연기념물 제주흑돼지와 식당의 제주흑돼지는 달라
막대기 휘두르며 볼일 보던 돗통시의 아찔한 기억도
제주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외식 메뉴를 꼽으라면 단연 돼지고기다. 관광객들도 제주의 돼지고기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제주에 오면 꼭 먹고 가는 음식이 돼지고기다. 근데 관광객들 상당수가 제주에서 돼지고기를 먹으면 더 싸게 먹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산이다. 육지의 식당보다 제주에서 돼지고기를 먹을 때 가격이 더 비싸 혹시 바가지를 쓰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바가지는 아니다.
제주에서 돼지고기 가격이 비싼 이유가 있다. 제주지역에는 다른 지역 돼지와 돼지고기, 부산물 반입이 일체 금지돼 오로지 제주산 돼지고기만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지난 1999년 12월 돼지열병 청정화를 선언한 이후 2002년 4월부터 반입 금지 정책을 시행, 제주에서는 제주산 돼지고기와 일부 냉동 수입육만 유통된다. 결국 제주도민이나 관광객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일반 돼지고기보다 비싼 제주산 돼지고기만 먹을 수밖에 없다.
제주산 돼지고기 중에서도 유독 인기가 있는 ‘제주흑돼지’에도 비밀이 있다.
지난 3월 제주흑돼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러면 시중에 파는 제주흑돼지도 천연기념물일까. 아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흑돼지와 식당용 제주흑돼지는 엄격히 구분된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흑돼지는 축산진흥원에 사육 중인 260여마리 뿐이다. 반면 식당에서 팔고 있는 제주흑돼지는 재래흑돼지와 외국산 품종을 교잡해 개량한 것이다.
제주흑돼지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외국에서 도입된 개량종 돼지와의 교잡으로 순수 재래돼지의 개체 수가 급감해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다 제주축산진흥원이 지난 1986년 가까스로 재래흑돼지 5두를 수집, 순수계통 번식을 통한 증식과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 등재하는 등 재래가축 유전자원 확보에 매진한 결과 최종적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제주 토종 흑돼지는 유전자 특성 분석 결과 다른 지방 재래돼지와는 차별화된 혈통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다. 외형상으로도 육지 흑돼지는 귀가 크고 앞으로 뻗은 데 비해 제주흑돼지는 귀가 작고 위로 뻗어 있다. 일반 돼지(교잡종)는 다 자랄 경우 사육기간이 165~180일, 무게 110㎏ 정도 되지만, 제주흑돼지는 210일, 무게 90㎏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제주 토종 흑돼지는 사육기간이 길고 무게도 적어 수익성이 높지 않지만 식당용 흑돼지는 무게와 사육기간이 일반 돼지와 비슷해 경제성도 높고 맛도 뛰어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제주 토종 흑돼지가 ‘제주 똥돼지’라고 불린 이유는 제주의 전통 변소인 ‘돗통시(돼지를 뜻하는 제주어 ‘도새기’와 화장실을 뜻하는 ‘통시’의 결합어)’ 때문이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돌담으로 둘러 터를 잡은 ‘돗통시’에다 돼지를 사육했었다. 한마디로 노천 화장실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돗통시에는 기가 막힌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돗통시에서 돼지는 인간 배설물의 처리, 식생활의 음식물 등 각종 폐기물 처리, 퇴비 생산, 돼지고기 제공 등으로 이어지는 환경친화적인 순환형 시스템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돗통시 문화는 제주에 관광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관광객들에게 부끄럽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결국 행정 당국에서는 재래식 변소 추방 운동을 제주 새마을 운동의 핵심 사업으로 전개했고, 이로 인해 돗통시는 대대적으로 개량 변소로 개조돼 실생활에서는 아예 사라졌고 지금은 민속촌 등 관광지에서 관람용으로만 볼 수 있다.
어릴 적 도시에 살다가 농촌 고모댁에 놀러가면 돗통시가 있었다. 돼지가 무서워 참다 참다 어쩔 수 없이 돗통시에 가게 되면 입구에 놓아둔 막대기를 꼭 챙겨 갔다. 화장실에 앉자마자 달려오는 꺼먼 돼지가 무서워 막대기로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도망가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게 너무 무서워 울면서 ‘큰일’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김영헌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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