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말투ㆍ축약형 단어도 강한 바람의 영향
바람의 신 영등할망 기리는 바람의 축제도
외세 바람에 아픈 역사… 지금은 자본의 광풍이
제주도는 흔히 겨울철에도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한겨울에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오면 공기가 다르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제주에는 바람이라는 변수가 있다. 바다에서,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으면 따뜻하다는 생각이 쏙 달아난다.
제주에서 수십년을 살고 있지만 겨울에 소복이 쌓이는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본적이 거의 없는 것도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다 흩날리게 해 제주해안지역에는 눈이 쌓이는 날이 많지 않다.
다만 한라산이나 중산간 도로는 겨울철이면 눈 때문에 교통통제가 이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교통사고도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체인 등 월동장비가 없으면 산간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끔 겨울철에 해안 쪽에는 햇빛이 쨍쨍한데 난데없이 눈이 수북이 쌓인 차량들이 지나가는 진풍경을 종종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주의 바람은 옛날부터 제주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불려왔던 것만 봐도 바람은 제주사람들에게 피해 갈 수 없는 숙명 같은 존재다.
제주의 강한 바람은 제주 사람들의 말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말이 거세고, ‘강(가다), 봥(보다), 왕(오다), 기(그래)’처럼 축약형 언어가 발달한 것도 바람의 영향이다. 제주사람들끼리 하는 대화를 듣다 보면 말이 세고 거칠어 마치 싸우는 것처럼 보여 가끔 오해하기도 한다.
제주 사람들은 바람을 억지로 이기기보다 그대로 받아 들였다. 거센 바람 때문에 초가를 낮게 지었고, 지붕을 집줄로 꼭꼭 동여매 바람에 대비했다.
제주 올레길을 걷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도 비슷한 맥락이다. 제주의 돌담이 바람 많은 제주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돌을 외줄로 쌓아 올려 빈틈이 생겨 바람을 찢는 ‘파풍효과’(破風效果) 때문이다. 지난 2003년 제주를 강타한 제14호 태풍 ‘매미’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도, 제주 돌담이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것도 옛 제주사람들의 돌 쌓기 지혜 때문이다. 이렇듯 제주 돌담은 산과 들, 해안가에 널려 있는 돌을 대충대충 쌓은 것 같지만, 바람의 리듬을 타게 쌓아진 것이다.
제주 섬사람들에 바람은 생명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제주에서 ‘영등할망’은 바람의 신이자 풍어와 풍농의 신이다.
제주어민들은 영등할망이 찾아오는 음력 2월을 영등달이라 하여,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배를 띄우지 않고 바람 축제를 벌였다. 어민들은 영등달이 되면 영등할망이 땅과 바다에 씨를 뿌리고 간다고 믿고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영등굿을 벌였다. 지금도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당에서는 영등달 초하룻날에 영등할망을 맞이하는 ‘영등환영제’를, 열나흘이 되면 ‘영등송별제’를 지내고 있다.
제주에는 자연바람뿐만 아니라 외세에 의한 바람으로 많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주는 고려 시대때 원나라(몽골)의 목마장이 됐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동북아 패권을 잡기 위한 군사적 거점이 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패권 경쟁으로 현재도 진행 중인 4?3사건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금 현재도 제주는 제주해군기지로 인한 갈등이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고, 중국 자본 등 외부 자본에 의한 난개발의 광풍이 부는 등 바람 잘 날이 없다. 바람 타는 섬 제주에 훈풍이 불어오길 기다려 본다.
제주=김영헌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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