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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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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

입력
2015.12.2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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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성탄절 전야. 그 날이 일 년 중 가장 로맨틱한 때라고 생각한 젊은 연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살쪄 돼지가 되어도 날 영원히 사랑할 거지? 응, 당연하지! 하느님께 맹세할 수 있어.

그러나 성탄절 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 시작된다. 날이 어두워져 사물을 분간할 수 없는 때, 그래서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물체가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이다. 마치 영화 ‘정사’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나 된 것처럼, 사람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또 한 해가 가고 오네요.”

“당신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선명해질까요?”

“아니요.”

“그럼 더 혼돈스러워지나요?”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연말연시를 맞아 시간이라는 흙탕물에 서 있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핵심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거치게 된다는 심리 변화 4단계, 부정-분노-체념-인정을 오롯이 밟아나가는 것이다. 자신은 충분히 단련되어 있으므로 그 중 어떤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자.

먼저 부정 단계. 내가 또 한 살을 먹을 리 없어! 365일이 지났다고 한 살 더 먹는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돼, 라고 스스로를 설득해본다. 지구의 공전주기에 따라 우리가 한 살 더 먹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다른 날도 아닌 하필 12월 25일에 예수가 탄생했다는 주장만큼이나 근거가 부족하다. 군주의 목을 베고 잠시나마 영국에 공화정 시대를 연 올리버 크롬웰은 복음서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성탄절을 금지한 바 있다. 12월 25일이란 날짜를 인간이 정했듯, 365일이 지나면 한 살 더 먹는다는 것도 인간이 정한 허구에 불과하다. 허구 때문에 감정의 기복을 겪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나이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음에도 기분은 과히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나이는 허구일지 몰라도 닥쳐온 노안, 오십견, 그리고 연말정산은 허구가 아니므로. 올리버 크롬웰은 결국 부관참시 당했으므로. 진짜 성탄이 언제이든, 12월 25일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케이크를 살 것이므로.

그래서 분노 단계로 진입한다. 젊었을 때는 팔다리가 몸에 잘 붙어 있었는데, 이제 안간힘을 쓰지 않으면 쑤시는 팔다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하수구로 굴러가버릴 것 같다. 끝나버린 잔칫상 먹다 남은 돼지고기 편육 같은 자신의 육체가, 아니 존재 자체가 한심스럽다. 분노를 다스리며 시간의 하수구에 빠지려는 자신의 존재를 끌어올리고 싶다. 늪에 빠진 허풍선이 남작처럼 스스로의 머리채라도 잡고 자신을 끌어올리고 싶다. 그러나 탈모가 너무 진행된 사람은 어떡하란 말인가. 화가 치밀어도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없기에 체념 단계로 진입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정 단계. 시간의 몰매를 피할 방법은 없다. 그나마 바로 이 순간이 남아 있는 나날 중에서 가장 젊고 좋은 때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길거리 인파에 섞이지 말자. 재미없는 건배사를 남발하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자. 새해의 운세, 새해의 사자성어 같은 신문 기사를 읽지 말자. 버려진 놀이공원 같은 데 혼자 가지 말자. 대신 자신의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을 찾아 고양이처럼 웅크리자. 오래 전 지구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화석으로만 남아 있는 거대공룡을 생각하자. 탐사선이 보내온 무심한 우주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영원을 추구하는 존재의 모순을 껴안고 애무하자.

하필 그 때 철없는 애인이 전화를 해서 묻는다. 나이가 먹고 살이 쪄서 돼지가 되어도 자기는 날 사랑할거야? 부정-분노-체념-인정 단계를 완수한 사람답게 온화하게 대답하는 거다. 아니. 그 땐 돼지를 사랑할거야. 당신은 사라지고 돼지만 남아있을 테니.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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