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법안 관련한 때아닌 위기논쟁
여당은 뜬금없고 야당은 책임감 없어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부터 다져야
1999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긴박했던 IMF사태는 큰 고비를 넘겼지만 위기설은 끊이질 않았다. 경제학자, 시장 이코노미스트, 언론은 '3월 위기설' '9월 위기설' '12월 위기설'식으로 매달 위기론을 끄집어냈다. 이유도 다양했다. 외채만기가 몰려 있다고 해서, 결산을 앞둔 외국자금이 대거 빠져나갈지 모른다고 해서, 은행들이 BIS 비율 때문에 대출회수에 나설 것이라고 해서, 심지어 아르헨티나 멕시코가 심상치 않다고 해서…. 그러나 위기설은 매번 빗나갔다. 경제의 면역력이 워낙 떨어져 있던 터라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릴 위험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제2의 외환위기 운운할 정도는 아니었다.
위기설은 일종의 '환란 트라우마'였다. 자라에 놀란 뒤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마음이랄까. 무방비 상태로 환란을 맞은 악몽 탓에, 학계나 언론은 소소한 악재에도 노이로제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선 최대한 보수적으로, 최악을 전제로 전망을 하는 게 나중에 틀리더라도 비난을 덜 받는다는 일기예보 식 면피심리도 작용했던 것 같다. 어쨌든 과장된 분석이었고, 무책임한 보도였다. 당시 위기설에 수없이 시달렸던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런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위기설만큼 편한 것도 없다. 정말로 위기가 현실화하면 ‘거봐라. 내가 위기가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 되고, 만약 위기가 오지 않으면 ‘거봐라. 내가 미리 경고를 한 덕에 대비를 해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거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환란의 잔영들이 사라지고, 경제가 정상국면에 접어들면서 위기설도 잦아들었다. 어느 학자, 어느 언론도 밑도 끝도 없이 위기설을 꺼내지는 않게 됐다.
그런데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경제위기설이 요사이 다시 등장했다. 보통은 위기가 코앞까지 닥쳐도 정부는 불안심리 확산을 막기 위해 끝까지 부인하고 진화하기 마련인데, 이번엔 언론ㆍ학계가 아닌 정부ㆍ여당에서 먼저 위기론을 꺼냈다. 노동관계법 원샷법 서비스기본법 등 쟁점법안들이 빨리 통과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게 '2015년 판 위기설'의 골자다.
사실 정부가 법안 관철을 위해 위기를 거론하는 건 손 쉬운 입법전략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도 정부는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을 위한 금융개혁법안이 야당 반대에 부딪히자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한국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법이 통과되든 실패하든 환란의 쓰나미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정부는 IMF에 손을 벌리는 순간까지도 이 궤변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정부는 같은 입법전술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론 위기설 등장 이후 법안처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야당이 정부 발(發) 위기론을 '국민을 우습게 보는 공포마케팅'으로 반박하면서 여야간 공방은 법안논란이 아니라 위기논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경제위기에 대한 정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지금이 충분히 위기상황이라고 믿는다. 저출산 저성장 저수익 취업난으로 이어지는 현 한국경제 상황은 18년 전 환란 때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정부 여당은 마치 원샷법이나 서비스기본법이 이 위기를 막아 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천만에 말씀이다. 위기는 이미 시작됐고, 법안 통과여부와 관계없이 위기는 계속 도를 더해갈 것이다. 하지만 법안이 해결책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국회에 묶어두고 있는 건 더 무책임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기업에 활력을,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만 있다면 국회는 법 정도가 아니라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수권정당의 자세다. 예민한 일부 노동관계법은 몰라도 원샷법, 서비스기본법까지 하염없이 붙들고만 있는 야당의 태도는 위기의식도, 대안도, 책임감도 없어 보인다.
법안처리 전략으로 위기설을 꺼낸 정부 여당은 뜬금없고 얄팍했다. 야당은 아예 경제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 속에서 좌절하는 건 결국 국민뿐이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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