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의미 없이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는 말들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주먹을 부르르 떨며 다짐한다. 잔인하고 처절하게 복수하리라. 교회에서 목사님은 종을 땡 울리고 두 손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기도 한다.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정치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외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 밖에도 별 감흥 없이 붙어 다니는 말 중에 연말연시 반성과 결심도 있다.
거룩하고 자비로운 이에게 온전하게 나를 맡기지 못해서인지, 사랑 받고 존경 받는 국민이 아니어서 그런지 한 해가 가고 오는 것도 그다지 설레거나 절절한 반성이 없다. 아마 거기에는 오십을 넘어선 나이에 촌부의 삶을 살며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그렇게 부러워할 것이나 연민할 것이 없다는 평범한 가치관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정서에 반응하는 통점은 세월의 굳은살에 가려지고, 열망하고 추구하라고 배운 것들은 과연 그럴만한 것인가 회의하게 되면서 나는 그저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정에서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성탄절이 끼어 있고 해가 바뀌는 요맘때는 날씨가 포근한 것 보다는 쌀쌀한 것이 좋다. 술 한 잔 걸치고 귀가하는 가장 손에 들린 치킨 봉지에서 고소한 냄새가 골목을 흐르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그들의 아들딸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번지는 연말의 겨울밤은 추워야 제격이다. 그래야 그들이 허연 입김을 내며 열고 들어가는 문 안의 세상이 더 안락하고 소중해진다.
이곳은 비가 내렸다. 협곡을 채우며 피어 오른 산안개가 묵묵한 사과 밭을 덮고 먼 산을 덮어 안개의 나라를 만들었다. 진돗개 두 마리를 끌고 안개나라로 산책을 갔다. 개들은 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미 개에게 멀리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목사리를 풀었다. 개들은 경주견처럼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들락거리며 빈 개집을 확인했다. 개들이 거실 창문을 기웃거리며 귀가를 알렸을 땐 돌아온 탕자를 맞는 것처럼 반가웠다. 개들을 묶어놓으려고 갔다가 가슴 철렁한 광경을 보았다.
개집 앞에 토끼가 죽어있었다. 토끼집으로 가보니 그물망이 찢겨지고 그 안에 또 한 마리 토끼가 죽어있다. 순간 몽둥이를 들고 개를 패려는데 개들은 낑낑거리며 꼬리를 바짝 내린 채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걸 어쩌란 말이냐! 개가 토끼를 사냥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 없는데 무슨 명분을 들어 개들을 팬단 말인가.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인연을 갖고 존재하는 것들을 내 욕심으로 합쳐 놓고 둘 다에게 구속을 하며 식구라는 이름으로 데리고 살았던 것이다. 책임을 물어야 할 자가 있다면 내가 제일 먼저일 것이다.
죽은 토끼 두 마리를 꺼내놓고 토끼장을 들여다보았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토끼 똥과 먹다 남은 고구마, 언 배춧잎들이 이빨자국을 남기고 흩어져 있다. 벽에는 겨울에 먹이려고 엮어놓은 시래기가 몇 줄 걸려있다. 이 좁은 공간 속에서 토끼들은 저보다 센 자들의 발소리에 떨며 하루 한 번 먹이를 주러 오는 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들을 어디에 묻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에 창을 열면 해가 떠오르는 동편으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고목 한 그루가 있다. 푸른 싹이 돋는 봄에도 노란 단풍이 든 가을에도 그리고 지금처럼 쓸쓸히 침묵하고 있는 겨울에도 나는 거실 창을 열면 그 자작나무 고목을 바라봤다. 과수원 건너편 그 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낙엽을 깔고 토끼를 묻었다.
지금 돌아와 거실 창문을 열고 자작나무 고목을 바라본다. 그리고 반성한다. 이젠 아무런 생각 없이 생명을 키운다고 구속하지 말자. 책임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자. 그리고 결심한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생과 사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며칠 남지 않은 이 해의 날들이 가고 있다. 우리에게 이변이 없는 한 금방 더 많은 날들이 커다란 백지를 들고 나타난다. 평범하게 뒤를 돌아보는 자가 평온한 내일을 맞을 수 있다. 그것이 쌓이는 게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또 한 해를 보내는 내 반성과 결심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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