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착 난민 미얀마인 22명 첫 입국
소수인종 출신으로 심한 박해받아
난민캠프 일당 6000원 불과했지만
아이들의 교육만은 절대 포기 못해
올해 10월 유엔에 신청해 꿈 이뤄
“자유를 찾아줘서 감사합니다” 미소
“전쟁과 노역, 그리고 가난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국에선 평화를 느껴보고 싶어요. 정이 많은 문화라고 들었습니다.”
23일 오전 8시30분 인천국제공항. 태국 난민캠프에 머물다 가족(8명)과 함께 입국한 쿠 뚜(44)씨는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미얀마어 “라이라이”를 연신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세 가족도 뒤를 이었다. 난민법 시행 2년 만에 미얀마 난민 22명이 ‘재정착 난민 지원제도’에 따라 국내로 첫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미얀마 내 소수민족(카렌족) 출신으로 1990년대부터 박해를 받았던 이들에게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아도 될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아이 넷을 이끌고 온 다른 30대 가장의 얼굴도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티파두타 마을에서 태어난 텐쏘(34)씨는 늘 강제노역의 두려움 아래 살아야 했다. 정부군 물자를 나르느라 삶은 항상 고달픔의 연속이었고, 동원을 피해 마을 뒤 정글로 숨어들어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23살이 되던 해, 그는 고령으로 노역의 위험이 없던 부모를 뒤로 한 채 혈혈단신 태국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안착한 곳은 미얀마 국경지역에서 8km 떨어진 태국 딱(Tak)주 메라 난민캠프였다.
7년 후 그는 난민캠프에서 배우자를 만나게 됐다. 4명의 아이를 낳은 곳도 캠프였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재정착한 친척이 있는 난민들은 경제형편이 나쁘지 않았지만, 텐쏘씨는 홀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캠프 내 옥수수농장에서 매일 일했는데도 일당은 150바트(한화 6,000원)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아이들의 교육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6살 때 오른쪽 눈 시력을 잃은 데다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아빠였지만, 아이들은 모두 캠프 내의 교육시설에 보냈다.
고향을 떠난 지 12년째인 올해 10월,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난민지위를 신청했을 때 희망 국가로 적었던 한국정부에 그의 가족이 ‘재정착 난민’으로 추천된 것이다. 세계 각국 정부는 자신들의 국가로 재정착을 원하는 난민에 대해 UNHCR의 추천을 받아 개별 심사 후 난민으로 수용하고 있다. 텐쏘씨 가족은 서류와 면접 심사, 건강 검진, 신원 조회 등을 거쳐 한국이 처음으로 받아들인 재정착 난민이 됐다. 법무부 관계자는 “텐쏘씨는 어느 지원자보다도 한국에 오길 바라는 열망이 컸다”며 “특히 아이들 교육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이날 인천공항을 찾아 미얀마 난민 22명의 입국행사를 열었다. 김영준 법무부 출입국ㆍ외국인정책본부장은 “난민 출신으로 미국에서 사회 지도자로 성장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전 국무장관 매들린 울브라이트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재정착 난민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국민들의 따뜻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난민들은 거주자격(F-2) 비자로 한국에 체류하며, 인천 중구 소재 출입국ㆍ외국인지원센터에서 앞으로 6개월~1년 간 한국 정착 교육을 받게 된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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