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 때던가? 성탄절 밤, 난 목자의 하나로 나의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 때, 하늘에 내 잘 아는 천사 하나가 나타나 얘기했다. 성경에도 쓰여진 그 귀한 말씀…. 그러나 내 귀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 천사 애, 평소보다 훨씬 예쁘다는 생각만…. 그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나는 넋을 잃었고… 그 소식은 다른 놈이…. 나의 첫 공연….
이비인후과 의사이신 장로님 작곡의 성탄 축하 음악극에서의 일이었다. 당시 왕십리에 살던 나에게, 같은 교회에 작곡하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위인전에서나 보던 작곡가 선생님이 그 왕십리에 계셨던 것이다. 이 사실이 익숙해지자 작곡은 결코 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나는 작곡가가 되었다. 이후에도 내 뒤로 몇 명의 작곡가들이 등장했으니 분명 그 분의 음덕이었을 것이다. 기억이 비록 희미하나 그 분의 음악은 단선율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진지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서 음악극은 성경 말씀 그대로 기쁘고 성스러웠다.
예술의 위대한 위력은 1차적으로 작가에게 있지만 이를 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현되기도 한다. 작가가 별 생각 없이 쓴 문장도 전달 과정에서 큰 의미를 갖기도 하고, 손쉽게 적은 가벼운 대사도 처리하기에 따라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가의 창작을 존중하고, 진지한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작품을 접하는 자신에게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작가는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매개자 혹은 감상자는 그것을 이해, 혹은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에서 출발하는, 역할 분담의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동일 작품이지만 작가와 감상자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에 대한 생각과 미적 만족을 추구하며 같지 않음에도 공감하는 경우도 있다. 장로님의 음악이 어린 목자의 성숙하지 못한 믿음과 예술성을 건드려 그 이상의 꿈을 자극했던, 아름다운 밤이었다. 비록 대사를 놓쳤지만….
교회 출석 여부를 떠나 내 어린 시절, 내 또래들에게 성탄절은 환상적인 시공간이었다. 매일이 똑같아 지루하기 짝이 없던 1년 중 성탄절은 양들과 목자, 천사, 큰 별, 동정녀, 동방박사 세 사람과 같은 생소한 요소들로 매해 새로웠다. 또 당시 아이들에게 낯설고 거대한 개념인 영광과 평화에 대한 하늘과 땅의 노래는 장엄하고 조화로웠다. 오늘날 캠페인과 같은 그 옛날, 평화에 대한 찬양을 생각하면 평화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인류의 유전적 숙명인 것 같다. 어찌되었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정받아 목자 행세를 했으며 다들 나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주목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는 나의 문화행위의 첫 걸음이었다.
청소년들의 문화 활동이 전무했던 1960, 70년대. 학교에서 독서, 문학, 연극반 등 특활로 겨우 숨통 트이던 시기. 남녀 공학이 거의 없어 반쪽 활동으로만 추정되던 시기. 그 부족함을 채워준 것은 교회 같은 종교 기관에서의 학생 활동들이었다. 나 역시 중ㆍ고등부를 통해 조직 활동을 경험,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음악 감상, 잡지 발간, 문학과 음악의 밤 등의 운영법을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후배들에게 전했다. 모든 것은 자발적이었고 거의 예산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스스로 자급하거나 생략, 대체해야 해서 ‘가난한 무대가 객석의 상상을 풍성하게 한다’는 시대적 잠언을 체득했다.
성탄 두어 달 전부터 누군가는 대본 작업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연출과 연기 구상을, 누구는 소품 준비를, 누군가는 배역을 다투기 시작했다. 모두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겨울 되어 철새 돌아오듯 성탄절 가까워지면 시작되는 자연 이치 같았다. 결코 쇼핑으로 해결될 수 없는, 성탄절 때마다의 용솟음치던 욕망이었다. 시대 본능과 같은.
황성호 작곡가ㆍ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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