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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성,실현가능성,지속성 고려한 기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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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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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가 잘되는 흰개미집의 구조를 이용해 짐바브웨 하라레에 건축된 이스트게이트센터는 생태모사를 이용한 대표적 사례다. 믹피어스 홈페이지
환기가 잘되는 흰개미집의 구조를 이용해 짐바브웨 하라레에 건축된 이스트게이트센터는 생태모사를 이용한 대표적 사례다. 믹피어스 홈페이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는 스탠퍼드대 기계공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켈리가 설립한 디자인 컨설팅 회사 IDEO가 있다. IDEO는 몇 년 전 기업 및 공공기관이 혁신가들과 협력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IDEO.org’라는 오픈 플랫폼을 만들었다. IDEO가 발간한 ‘인간중심 디자인 툴킷’에는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과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도구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툴킷에는 적정기술 개발의 세 관점으로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적합성) ▲기술적, 조직적 측면에서 실현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실현가능성) 그리고 ▲경제적,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지속성) 등을 제시하고 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물 파는 사업을 하던 로니 스투이버는 어느 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회전놀이기구(일명 뺑뺑이)를 신나게 타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이 회전력을 이용해 지하수를 끌어 올려서 물탱크에 저장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프리카에서는 지금까지 주로 손 펌프를 사용해서 지하수를 힘들게 끌어 올렸는데 이 장치를 사용하면 손 쉽게 물을 끌어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스투이버는 이 아이디어를 1989년에 있었던 농업 박람회에서 발표했다. 당시 농업박람회에 참여했던 광고회사의 임원인 트레버 필드가 의기투합해 플레이펌프(Playpump)라는 상표 등록을 하고 특허도 신청했다. 이 펌프는 처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신설학교에 설치된 플레이펌프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직접 돌려보는 모습이 TV에 방영되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 세계은행으로부터 세계은행 개발시장상을 수상했고, 2003년에 중간기술개발집단(ITDG) 등이 제작한 소책자 ‘작은 것은 효력이 있다: 빈곤감소를 위한 기술’에 우수 적정기술 10가지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또한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케이스재단이 플레이펌프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서 투자자를 모집, 2008년까지 남부 아프리카에 1,000개의 플레이 펌프를 설치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작동되는 플레이펌프를 보기가 어렵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캐나다 엔지니어인 오언 스콧이 한 지역주민과 나눈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놀이기구는 여성이 돌리기에는 너무 힘이 듭니다. 특히 나이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돌릴 수 없어요. 손 펌프가 훨씬 쉽지요. 그리고 펌프를 바꾸는 문제에 대해 왜 우리와 아무런 상의가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 펌프가 이곳에 왔어요.” 성인 여성들이 사용하기 힘들다면 하물며 어린아이들이 돌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덧붙여 스투이버와 필드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아이들은 뺑뺑이를 매우 빠르게 회전시키고 나서 여기에 올라타서 속도감을 즐긴다. 하지만 플레이펌프는 물을 끌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뺑뺑이를 빨리 돌리기가 어렵고, 따라서 속도감을 느낄 수도 없다. 한 마디로 탈 재미가 없는 것이다. 섭씨 40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서 누가 재미도 없는 놀이기구를 하루 종일 타고 있겠는가?

이와 같이 적정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역량을 개발하려면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필자는 2012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적정기술 교육을 실시해 왔다. 처음에는 개발도상국 주민을 위한 적정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췄지만, 청소년들이 개발도상국 주민들을 만나기가 어렵고, 따라서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2013년부터는 우리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스스로 도출하고 해결하는 것으로 교육 방향을 전환했다. 인하대에서 작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적정기술 교육 프로그램인 ‘나눔의 공학’ 교과목도 바람직한 접근법 중 하나다.

실현 가능한 것

적정기술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 중 하나로 생태모사도 있다. 필자는 2010년에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있는 국립가나대를 방문했을 때 길가에 흙 무덤이 높게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바로 흰개미집이었다. 흰개미집은 환기가 잘 되는 구조여서 내부가 매우 시원하다고 한다.

가나대에서 발견된 흰개미집(TermiteMounds)의 모습. 홍성욱 교수 제공
가나대에서 발견된 흰개미집(TermiteMounds)의 모습. 홍성욱 교수 제공

짐바브웨의 건축가인 믹 피어스는 이 흰개미집의 원리를 이용해서 1996년에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 이스트게이트센터를 디자인하였다. 이 센터는 냉방장치를 가동하지 않고 자연 대류만 이용해서도 실내 온도를 항상 24도로 유지하며, 비슷한 크기의 건물이 실내 온도조절에 사용하는 에너지의 단 10%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 센터에선 낮 시간 동안에는 건물에 있는 열용량이 큰 천이 열을 흡수한다. 저녁이 되어 외기 온도가 떨어지면 건물 내부의 더운 공기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면서 건물 아래 부분에 있는 찬공기를 밀어낸다. 밤에도 이 과정이 계속되며, 건물 바닥에 있는 구멍을 통해서 찬공기가 흐르면서 건물에 있는 천을 식혀서 다음 날을 준비하게 된다. 피어스는 생태건축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에 네덜란드의 프린스 클라우스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영국 웨스트민스터궁 맞은편에 있는 포트쿨리스 하우스에 이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프랑스 릴에 있는 ADEO 사옥의 모습 역시 흰개미집의 구조를 본뜬 모습이다. 아트리에 텔레스코피크 홈페이지
프랑스 릴에 있는 ADEO 사옥의 모습 역시 흰개미집의 구조를 본뜬 모습이다. 아트리에 텔레스코피크 홈페이지

또한 주택리모델링 분야에서 세계 최대 기업인 프랑스 ADEO의 릴 사옥도 외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냉난방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대류를 이용하여 실내 온도를 조절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만 강조한 나머지 사방을 통유리로 시공한 탓에 여름 내부가 찜통과 같은 한국의 몇몇 건축물들과 비교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태모사를 이용한 다른 예로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의 풍뎅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도 있다. 나미브 사막에는 일년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여기 사는 풍뎅이의 등에는 물과 친화도가 좋은 친수성 부분(돌기 부분)과 물을 배제하는 소수성 부분이 있다. 나미브 풍뎅이는 돌기를 사용해 대기 중의 수분을 응축하고, 이 물방울을 모아 갈증을 해소한다. 나미브 풍뎅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구엘 갈베즈는 2012년에 프로젝트 ‘NBD Nano’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물병의 표면을 친수성 물질과 소수성 물질로 만든 후에 이곳으로 공기를 통과시켜서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을 모으는 연구를 비롯하여, 생태모사를 활용한 다양한 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것

플레이펌프 설치 비용은 약 8,500달러로, 손 펌프보다 3배 정도 비쌌다. 아프리카 주민들이 플레이펌프를 스스로 설치할 자금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초기에 외부에서 자금이 계속 유입될 때는 설치 비용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지만, 고장 나서 방치된 플레이펌프 사진이 언론매체를 통해 방영되고 나서는 자금 지원이 모두 끊겼다. 필드는 처음부터 물탱크의 사면에 광고를 유치해서 플레이펌프 제작 비용의 일부를 자체 조달하려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허허벌판에 있는 물탱크에 광고를 게시하려고 돈을 지불하겠는가?

적정기술 제품이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족동식 펌프와 같이 개발도상국 주민들이 제품을 구입해서 사용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는 생계형(또는 가치창출형) 적정기술 제품의 경우에는, 주민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제품을 구입한다(본보 8월 10일자 21면). 족동식 펌프를 사용해서 밭에 물을 대면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서 더 넓은 면적에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우기뿐만 아니라 건기에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을 심을 수 있으므로 당연히 소득이 증대한다. 2012년에 한국을 방문한 폴 폴락은 자신이 설립한 IDE에서 족동식 펌프를 25달러에 구입한 어느 농부가 1년 만에 100달러를 벌어서 3배의 수익을 올렸다고 말했다.

2011년 매사추세츠공대(MIT) 설립 150주년을 맞이해서 D-lab에서는 지난 10년간 D-lab 수업 시간을 통해서 개발된 적정기술 제품들을 일반에 공개하였다. 하지만 D-lab 연구원이 고백하였듯이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자극 받은 D-lab에서는 적정기술 제품을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을 사용해서 확대 보급할 목적으로 ‘스케일-업스(scale-ups)’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지난 10년간 개발된 적정기술 제품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사탕수수 숯 프로젝트가 스케일-업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고, 이를 수행할 펠로우를 선발해 지원하고 있다. 결국 적정기술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의 동반이 필수적인 것이다.

지난 9월 뉴욕에서 있었던 유엔총회에서는 향후 15년간 국제사회에서 함께 추진할 어젠다인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인준하였다. 17개 항목의 개발목표는 인간중심, 번영, 존엄성, 지구환경 등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재정적, 비재정적 이행수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비재정적 이행수단에는 과학, 기술, 역량 강화 등이 있는데, 이 중에는 ‘적정신기술’도 포함된다.‘지속가능발전목표’의 등장으로 전 세계적으로 적정기술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 더 커질 전망이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적정기술 개발의 세 가지 관점을 염두에 두고 적정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지속적으로 키워서,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성욱 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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