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웬만하면 봐 주려고 했다. 옛날 어디선가, 어쩌면 만두소에서 한 두 번 봤을 법한 지들 조상을 생각해 ‘그래, 먹을 만큼 먹고 가겠지. 그냥 놔두자’ 했었다. 처음에 서 너 마리였던 꿩들이 그새 식구를 불렸는지, 호객행위로 불러 모은 건지 한꺼번에 8마리가 날아다녔다. 밭 위쪽 절반은 그 놈들 주기로 맘먹었고, 그래도 농막 바로 앞은 ‘겁이 나서도 못 내려오겠지’ 했는데 허를 찔렸다. 촉촉한 콩 앞에서 겁을 상실한 놈들이 휴전선을 넘어 포복해 내려왔다. 서로 간에 합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었다. 돌을 집어 들어 아무데나 던졌다. 맞으면 지들 책임이고 안 맞아도 겁은 먹겠지 했더니 역시나 위협적인 투석에 댓 마리가 날아갔다. 혹시나 해서 다가가보니 ‘배째라’식으로 버티던 나머지 몇 마리가 지척에서 푸다닥 치오르며 나를 놀래 켰다. 작전이었을까. 돌에 맞은 꿩은 한 놈도 없고 겁은 오히려 내가 먹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내리는 비에 콩 꺾을 날이 없었다. 저매댁 어머니네는 수확해 놓은 콩을 제대로 말리지 못해 썩어 내버렸다고 했다. 빠삭한 콩을 베려던 계획을 수정해 되는 대로 거두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새벽 빗소리에 놀라 콩 덮으려고 농장으로 튀어나오는 짓도 힘들었다. 이러다간 꺾어 놓은 콩도 무사하지 못할게 분명했다. 하늘도 사정을 안 봐주고 꿩마저 방해하니 탈곡이 덜 되더라도 콩 타작을 서둘러야 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빌린 콩 탈곡기를 트럭에 싣고 밭으로 들어갔다. 콩깍지 날아갈 방향을 잡기 위해 트럭을 다시 움직이려는데 뒷바퀴가 빠져 헛돌았다. 이래 저래 해봐도 헛수고였다. 일단 진행했다. 집 텃밭에서 키운 수박콩을 먼저 넣어 돌렸다. 양이 얼마 안 돼 콩이 적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심하게 적었다. 서운해 할 겨를 없이 메주콩을 넣기 시작했다. 멀리 날아가는 콩깍지를 보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 같았다. 그랬다. 작년 탈곡 때 바람구멍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사지사방으로 날아간 콩을 줍느라 고생했던 걸 깜박했다. 잽싸게 스위치를 내리고 탈곡기 앞으로 내려가보니 역시나 작년과 똑같다.
밥상머리에서 아들과 얘기했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시행착오는 어찌 보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거든. 사람이 동물과 다른 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기 때문일 거야.” 나는 어디에 해당 될까. 동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거라고 폄하한 게 잘못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동물에 가까운 걸까. 고민할 겨를 없이 우선 줍는 게 상책이다. 작년과 똑같이 주저앉아 작년과 똑 같은 포즈로 허리춤 부여잡고 콩을 주웠다. 메주콩은 그나마 뽀얀 색이라 쉬웠지만 수박콩은 20년 전 예비군복 무늬로 위장하고 있어서 찾기도 어려웠다. 괴롭고 한심했다. 시골에 내려와 다섯번째 맞는 겨울... 개도 3년이면 달라진다는데 나는 뭐가 나아진 걸까.
얼마 전 서울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 한 분이 농장으로 찾아왔다. 밝은 얼굴로 귀농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곧 농지를 살 예정이고 바로 내려갈 거라고 했다. “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 나왔다. “웬만하면 돈 더 모아서 귀촌으로 하세요.” 선배는 황당한 표정을 했다. 사실 나도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런대로 할 만 해요. 힘들지만 괴롭진 않아요” 하며 부추기는 뉘앙스의 답변을 했었는데, 기껏 결심을 하고 금방 결행할 선배에게 귀농 말고 귀촌을 하라는 매몰찬 답을 하고 나니 미안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길게 나눴다.
먹고 사는 문제? 살아보니 살만하다. 내가 농사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그나마 퇴직금이랑 모아 온 돈 금방 다 까먹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했던 것에 비해 살만하다. 먹거리는 내 것도 있고 나눠주시는 것도 있고 해서 큰 돈 안 든다. 자연스레 외식도 줄어들고 입는 거 덜 신경 쓰다 보니 큰 문제는 없다. 농사로 버는 것에다 기회 되는대로 아르바이트도 하면 월수입도 쉼표 두 개 쯤은 찍을 수 있다.
아이 키우는 문제? 아이가 잘 알아서 한다. 아이가 꼭 공부를 잘 한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아이 몫이라는 얘기다. 같이 지내는 시간을 늘리고 잘 지켜봐 주기만 하면 애들도 좌충우돌 하면서 제 길을 가는 것 같다. 간섭을 애정으로 알아달라고 하거나, 지금 너희들보다 우리 자랄 때가 더 힘들었다고 우기지만 않으면 아이들도 제법 어른스럽게 생각할 줄 안다. 애 만도 못한 어른을 판별해 내는 능력도 어른보다 나아서 그렇게 나이 먹지 말아야겠다는 판단도 잘 하는 편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맘에 들지 않지만 부모한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아서 고맙고 미안하다.
건강문제? 조절만 잘 하면 좋아지는 게 확실하다. 물과 공기는 좋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 좋은 섭생을 이기지는 못한다. 특히 일하는 것 보다는 먹는데 적합한 게 내 체형이라 더 힘든 것도 있다. 어쩌다 조금 열심히 일했다 싶은 날은 스스로를 대견해 하면서 음식으로 보상받으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앞다리 살 구워서 소주와 함께 흡입한 다음날은 똥도 곧게 나오고 색깔도 훤한 편이라 ‘고기가 내 몸에 맞는 건가’ 하는 착각도 자주한다. 착각이 잦은 게 문제다.
얘기를 듣던 선배는 다 괜찮은데 왜 내려오지 말라는 거냐고 물었다. 문제는 앞으로의 전망이다. 요즘 같은 때에 전망 좋은 분야가 어딨냐고? 맞다. 드물 거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라가 작정하고 막으려고 하는 게 농업이니 어지간하면 다른 일 하라는 거다. 실제로 가치를 생산하지도 않는 집값과 땅값은 살리려고 범 정부적으로 애를 쓰지만 농산물값은 폭락해도 신경 끈 지 오래다. 신경 끄고 가만히 놔두면 그나마 좋겠지만 오히려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이 나라 저 나라와 FTA 체결하면서 수출을 키워야 하니 농업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건 아이들도 알 만큼 반복했다. 농민들이 반대하고 시위도 했지만, 정부 계획대로 안 된 게 없었다. 그렇게 당해왔다. 그런데도 또 비상이란다. 정부 말을 곧이곧대로 듣자면 곧 나라가 쓰러질 판이다. 시위하다 쓰러진 농민 때문에 더 힘들단다. 의무조항도 아닌 밥쌀 수입 하지 말아달라고 하니 제발 끽 소리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말이다. 듣고 있던 선배는 흥분하지 말고 얘기하라고 달랬다.
얼마 전에 한 국회의원은 “(농업이) 기업을 뜯어먹는다.” “(상생협력기금은) 죽어가는 한국농업을 보조금으로 연명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농사꾼들이 기업에 돈 내놓으라고 한 적 없다. 지 말대로 농업이 죽어가는 게 확실한데, 이왕 죽을 거 연명치료 거부하고 존엄하게 돌아가시길 바라는 건가. 전투기 한 대 값도 안 되는 상생협력기금이 오롯이 농민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줄로 알고 그러는 건가. 애매한 지원금 남발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똑똑한 사람들 모아서 식량자급정책이나 제대로 세워주는 게 농민들 바람에 가까울 거다.
며칠 전에는 경제를 담당하는 수장이 수도권 농업진흥지역 10만ha를 주택부지로 전환해서 임대주택 5만호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가관이다. 농업진흥지역은 식량위기에 대비해서 지정해 놓은 마지노선인데 상관 없단다. 국제경제상황과 맞물려 부동산 위기가 거론되고 대도시 아파트 공급 과잉으로 문제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도 그래야겠단다. 농지는 한 번 택지로 변경되면 다시 농지가 되기 힘들다. 식량 자급률 30%도 안 되는 나라에서 농지를 줄이겠다는 게 정상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 양반은 한국경제가 위기상황이 아니라고 했단다. 나라는 비상인데 위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장관 그만두고 국회의원 되고 싶어 말년 병장 심장으로 일한다고 했다. 떨어지는 가랑잎 조심하면서 조용히나 있으면 좋겠구만.
횡설수설을 조리 있게 들어준 선배는 대안이 있냐고 물었다. 대안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게 있다고 말했다. 내셔널트러스트. 개인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자산을 확보하기 영국에서 시작된 시민환경운동이다. 이걸 변형시켜서 개인이 해 보려고 한다. 그냥 돈을 내라는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구례에 있는 논을 사서 지주가 되고, 나는 그 땅을 빌려 농사 짓는 자발적 소작인이 되는 거다. 지주는 자기 땅을 빌려 준 대가로 시중 금리에 해당하는 현금을 받거나 쌀로 받는다. 최소 20년간은 이 땅의 용도를 쌀농사 이외의 것으로 바꾸지 못하고, 그 후에는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정부의 정책도 그렇고, 현지 주민들도 돈 안 되는 농사 대신 다른 용도로 바꾸는 추세가 강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줄어드는 농지를 조금이라도 보전하자는 취지다. 지주는 쌀 시장이 개방되고 곡물시장이 흔들려도 안정적으로 가족이 먹을 친환경 쌀을 확보할 수 있다. 나도 수입이 늘어날 테니 서로 좋지 않겠나. 선배는 다시 한 번 찾아 오마 하며 돌아갔다. 그러려구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진짜로 귀농을 포기하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얼추 콩을 다 줏어 갈 무렵 장씨아저씨가 들어오셨다. “낼 비온다는디 어여 허지, 앉아서 놀구 있나?” “그러게요. 얼른 해야 하는데 그러네요.” 아저씨가 콩을 날라다 주셨다. 콩 한 더미 척 꾸려 옮기시는 모습이 나와는 사뭇 다르다. 아저씨는 커피 마실 때 보다 일할 때 진짜 멋있다. 일생의 그래프에서 떨어지는 체력 곡선과 올라가는 경험 곡선이 딱 만나는 점에 계신 것 같다. 최고의 노동력을 갖추신 농사 전문가, 건장한 칠순 청년의 모습이다.
아침 일찍 D동생에게 전화했다. “부탁이 있는데...” “예 형님, 편하게 말씀허세요.” “차가 빠져서 그러는데...” “형님, 지금 갈게요. 농장이신가요, 집이신가요.” 동생이 4륜 구동 트럭을 타고 집으로 와서 나를 태우고 농장으로 갔다. 줄을 차에 걸다 진창 밭에 자빠지고 넘어지고 하는 걸 보니 미안했다. 차를 꺼내고 난 뒤 커피 한 잔 주면서 고맙다고 했더니 동생이 펄쩍 뛴다. “형님, 그런 말씀 마씨요. 내가 그렇게 쓰일라고 태어난 거고, 그럴라고 트럭도 산 거 지라.” 고마웠다. “난 별 도움이 안 되고 부탁만 하고 그러니까...” “형님, 형님이 여기 내려오신 게 도움이고 여기 계신 것이 도움이고 그러지라.”
그럴까. 나도 여기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일까. 모르겠다. 하긴 아니라도 이제 별 수 없다. 여기서 해 먹고 살 수 있는 게 농사 말고는 없는 것 같으니까. 배 째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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