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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창업 준비 3개월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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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창업 준비 3개월의 사회

입력
2015.12.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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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 않은 우리 동네에 커피숍이 또 하나 개업 준비 중이다. 면적은 5평 남짓. 그런데 그 커피숍 주위에는 이미 5개의 크고 작은 커피숍이 있다. 주위라고 해봐야 직선거리로 200m 정도다.

이 동네에는 김밥가게가 3개, 치킨가게 4개, 족발집 3개, 생맥주집이 3개가 몰려 있다. 생맥주집 하나는 1년도 안돼 매물로 나왔다. 집 앞이라 퇴근할 때 가끔 들르던 곳이어서 한 번은 “월세가 얼마나 되냐”고 물어봤더니 “월 200만원”이라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당시 속으로 ‘6개월이면 망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오래 버틴 셈이다. 커피숍을 준비 중인 분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성공하기는 희박하다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고 부부가 해 인건비 정도 건지면 다행이다.

얼마 전 흥미 있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2년 사이 사업을 시작한 자영업자 74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3.3%)이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준비를 해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준비기간 1년 미만은 무려 92.4%이나 됐다. 거의 모두가 충분한 준비나 사전조사 없이 서둘러 창업하는 셈이다. 왜 서두르는 굳이 설명 안 해도 알 것이다. 오죽 급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또 562만 명의 자영업자 가운데 402만 명은 고용원이 한 명도 없는 영세사업자로 분류됐다. 추가로 120만 명은 무급 가족종사자가 있는 자영업자였다. 즉 522만 명이 인건비나 제대로 건지면 다행인 그야말로 ‘품팔이 자영업’을 하는 셈이다. 4인 가족 기준이면 무려 2,000만 명에 달한다.

이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창업자들은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고, 기업은 직업교육, 정부는 재취업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레 내쳐 중년의 남성들이 ‘생계형’ 창업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기업들에게 시간을 갖고 직업교육을 시켜주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저성과자의 일반해고를 가능케 하겠다고 선언한 정부가 많은 돈이 드는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에 성의를 보일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꼼꼼한 준비는 안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못하기 때문에 그럴 개연성이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늦은 72.9세에 은퇴한다. 그런데도 노인 둘 중 하나(49.6%)는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가장 오래 일하면서도 가장 가난하다는 한국인들이 처한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인 빈곤율이 헝가리(9%) 폴란드(8%)의 5배가 넘는 걸로 나타났으니 꼭 선진국들과 비교한 것도 아니다.

글로벌 경기침체 하에서 수출주도의 한국경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수출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대기업에 힘을 실어주려는 정부의 노력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대기업을 굴러가게 하는 건 노동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때 경제민주화 공약을 하면서 첫 번째로 든 게 ‘경제적 약자의 확실한 권익보호’였다. 대기업에 비하면 중소기업이, 사용자에 비하면 노동자가, 집주인에 비하면 세입자가 경제적 약자일 것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강자로만 구성된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간혹 노조를 경영의 걸림돌로 여기지만 공무원, 교원을 제외한 민간 노조조직률이 9.2%에 불과한 형편이다.

준비 없는 자영업자가 양산되는 걸 막으려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 바꾸려는 노력이 없으면 나의 손자손녀가, 부모가, 동료가 언제 자영업의 레드 오션에 빠질 지 모른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 자영업자들에게 장기간 준비해 창업하라고 조언하는 건 차라리 욕에 가깝다.

이범구 경기본부장 eb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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