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공동체의 한 철학자는 매주 금요일 하루 종일 공동체에 머문다. 아침 10시부터 서양 철학사, 오후 4시부터 근대 철학, 오후 7시30분부터는 칸트를 강의한다. 수강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도 마찬가지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강의를 듣거나 세미나를 하며 더러 격한 토론을 벌인다. 학생, 주부, 은퇴한 교사, 프리랜서 작가, 법조인, 청년 연구자…. 이들이 공부하는 외형은 고3 수험생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면은 천양지차다. 고3이 마지못해 공부 한다면 이들의 공부는 즐겁다.
이들이 처음부터 종일 공부를 한 건 아니다. 시작은 칸트를 읽는 것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칸트를 공부하다 보니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홉스, 로크, 버클리 등을 읽는 게 필요했다. 서양 철학사 반은 그 뒤에 생겨났다. 고대철학, 중세철학에 무지한 채 근대철학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숙제는 살림을 맡은 내게 떨어졌다. 강의하는 학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하는데 이게 만만찮은 것이다. 그나마 강의 참여자가 많을 땐 괜찮았다. 인문학 공동체에서도 대학 못지 않은 연구교수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강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참여자가 줄어들자 문제가 생겼다. 이들이 내는 참여비로는 충분한 사례비를 만들 수 없게 된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을까?
3년의 유예 끝에 내년 1월 1일 시행될 예정이던 시간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다시 유예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 법이 만들어진 계기는 5년 전, 열악한 시간 강사의 현실을 일깨운 한 젊은 학자의 자살이었다. 강사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법의 취지는 좋았다. 시간강사들에게 교원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쉽게 해고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문제는 대학이었다. 시간강사에게 더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각종 차별 조항도 문제였다. 시간강사 대신 초빙교수나 겸임교수를 써도 된다고 명시한 탓이다. 법 시행이 다가오자 대학들은 편법 마련에 바빴다. 대표적인 방법이 초빙교수의 처우를 확 낮추는 한편 이들에게 강의를 몰아주는 것이었다. 초빙교수에게 강의를 몰아주든, 시간 강사에게 강의를 몰아주든 기존 강사들의 대대적인 해고는 불가피했다.
“대학가에 초특급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연말이 되도록 대학이 다음 학기 강의 계획도 못 세운 채 허둥대자 젊은 학자들이 술렁댔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거나 갓 학위를 받게 된 연구자들의 사정은 더 나빴다. 기존 강사도 쫓아내야 할 판에 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법이 시행될 경우 학문 후속 세대가 끊기는 건 시간 문제였다.
곡절 끝에 지난 13일 법 시행을 2년 유예하는 내용의 재개정안이 발의됐다. 강사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논의가 5년 전으로 회귀할 공산이 커졌다. 하나 더 있다. 이 과정에서 젊은 학자들의 지위는 더욱 불안해진 것이다. 무엇보다 관건은 정부와 대학의 자세다. 문제는 돈인데, 정부와 대학 모두 시간 강사들에게 돈을 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으리으리한 건물에 1억 원 안팎의 고액 연봉 교수와 1,000만 원도 못 되는 연봉에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시간 강사의 공존. 강사법이 유예된 대학의 기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시간강사인 학자들의 역량이 전임 교수에 뒤지는 것은 아니다. 연구 실적이나 강의에서 전임을 압도하는 시간강사도 수두룩하다. 이들이 원하는 건 전임과 같은 고액 연봉이 아니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면서 지속할 수 있는 연구와 교수다. 그런데 대학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송년회 시즌이다. 인문학 공동체라는 공간에서 학자들과 진지전을 벌인지 5년. 어찌 어찌 살아 남았으나 쌓인 건 허다한 실패 경험이다. 그럼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제 학자들의 생활과 연구 교수가 가능한 성공 모델을 하나 만들어낼 때가 되기도 했으니.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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