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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근대가 만든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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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근대가 만든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별세

입력
2015.12.1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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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기원 파헤쳐 학계 큰 영향

인도네시아 등 현장 중심 사례 연구

민족주의 연구의 독보적 권위자인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국제학과 명예교수가 13일 인도네시아 방문 중 별세했다. 79세.

외신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동자바주의 한 호텔에 머물던 고인은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숨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저서 ‘세 깃발 아래에서(Under Three Flags)’의 인도네시아판 출간을 기념해 현지를 방문했다. 10일 ‘인권의 날’에 맞춰 인도네시아대 기념강연을 했던 것이 마지막 공식일정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앤더슨 교수는 1936년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영국계 아일랜드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부친은 중국 해관(海關)에서 일했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하며 케임브리지대에서 석사를,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코넬대 교수로 재직했다.

대표 저서는 1983년 출간한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다. 이 책은 종족, 혈통, 언어, 문화 등이 민족주의 형성의 주요 원인이라는 관념을 전면 부정하고 민족주의를 구성한 근대 국가의 담론과 정치력 등을 파헤쳤다. 그는 민족을 고대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실존적 집단이 아닌 근대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구성물로 봤다. 앤더슨 교수는 이 책에서 “민족은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라며 근대의 인쇄술 등을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한 요소로 지목했다. 이 같은 주장은 세계 학계에 충격을 안기며 민족주의 연구에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했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앤더슨의 이 책에 대해 “제국이 식민지를 통치하며 단순히 이식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소외됐던 집단들을 작동시켜 형성했던 민족주의의 실체를 지적한 저작”이라며 “고인이 개인적으로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가진 주변부적 상황도 이런 학문적 이해에 도움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상상의 공동체’는 한국어를 비롯해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앤더슨 교수의 학문 활동의 뼈대는 동아시아 연구다. 박사 논문으로 인도네시아 독립혁명사를 다룬 고인은 코넬대 연구과제의 일환으로 현지조사를 떠나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등을 연구했다. 이후 “이 쿠데타가 꼭 공산당에 의해서만 획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했다가 수하르토 군사 정권에 의해 입국 금지 당하기도 했다. 그의 입국이 허용된 것은 1999년이 돼서였다.

2005년 고인의 첫 한국 방문 당시 초청자였던 전제성 전북대 교수는 “앤더슨은 냉전 논리, 국익의 논리를 과감히 초월한 주장으로 존경 받은 지역 연구자였다”며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연구 지역 방문을 금지 당하는 등 제한을 받았지만 필리핀, 태국 등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 훌륭한 저작을 남겼다”고 말했다. 앤더슨 교수는 지난 4월 광주에서 열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비전포럼’ 참석차 두 번째 방한했다. 당시 기조강연에서 “옛 정치인의 아내, 딸 즉 ‘공주’들이 권력을 쥔 점 등 아시아 정치사에는 예외적 특징이 많다”고 진단했다.

많은 학자들이 현장을 중시한 그의 연구 태도에 경의를 표했다. 1990년대 말 하버드대 하버드옌칭연구소 합동연구학자로 코넬대에서 강의하며 고인을 만난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사례 연구와 일반 이론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보통 여기지만 앤더슨 교수는 가장 구체적인 사례 연구가 가장 보편적인 일반 이론과 보편이론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꾸준히 현장을 찾으라며 ‘이론은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온다’고 조언했던 것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앤더슨이 한국처럼 국제정치적으로 독보적인 경험을 지닌, 즉 분단, 냉전, 사회변동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낸 곳에서 보편이론이 나오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세 깃발 아래’의 한국어판 번역자이자 지금은 절판된 ‘상상의 공동체’ 재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서지원 서강대 교수는 “석사 과정일 때 태국 방콕의 한 학회에서 앤더슨을 만났다”며 “그는 여러 조언을 해주며 팍(PAKㆍ인도네시아어로 ‘선생님’) 대신 옴(OMㆍ아저씨)으로 부르라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안타깝지만 사랑하던 인도네시아에서 숨을 거둔데다 현지 언론과 청년들의 추모 물결이 넘치고 있어 어쩌면 미국에서보다 덜 외롭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고인의 유해는 15일 화장돼 연구 인생의 시작과 끝인 인도네시아 자바해에 뿌려질 것으로 전해졌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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