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폐렴이 심해지는 바람에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 결정이 갑자기 내려져 급히 짐을 꾸려야 했다. 입원 기간은 짧으면 1주일 길어지면 2주일 이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1주일’과 ‘2주일 이상’ 사이의 시간 차가 제법 커서 작은 트렁크 안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난감했다. 그다지 난감해 할 일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마 경황없고 황망한 마음 상태가 그런 식으로 표현되었으리라.
아이가 좋아하는 인형과 동화책 몇 권, 스케치북, 색연필을 챙겨 넣고 보니 가방에는 빈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즉석밥 몇 개를 넣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다른 것이었다. 서재로 달려갔다. 쌓아둔 책 무더기 앞에서 엄청나게 고민한 끝에 간신히 두 권을 골라 넣었다. 갓 출간되어 아직 읽지 못한 책 한 권과, 올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앞자리에 두고 싶은 책이 각각 한 권씩이다.
그러나 병실 생활에서 책을 펴들 만한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아이는 가지고 온 그림책을 일찌감치 다 읽고는 텔레비전의 만화 채널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그럴 때가 보호자에게는 한숨 돌릴 유일한 시간이었다. 익숙지 않은 간병인 노릇은 꽤나 고단했고, 쉴 때면 스마트폰 화면을 영혼 없이 터치할지언정 책을 꺼내 읽을 여유는 없었다. 몸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의 문제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 독서량이 너무 적다고, 사회분위기가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간다고, 책을 읽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독서 캠페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았다. 독서 행위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후 최소한의 ‘여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그 ‘여력’을 보유한 사람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말 저녁 혼자 동네식당에 가서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습관처럼 책을 꺼내 들었는데 텔레비전의 예능프로그램 볼륨이 너무 커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연예인들이 전국 방방곡곡 여행 다니며 노는’ 프로그램의 볼륨을 줄여달라고 부탁하려다 보니,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나르면서도 계산을 하면서도 흘끔흘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단다. 때론 따라 웃고 때론 진지하게 시청을 하는 모습이 새삼 낯설어서 그 중 한 분에게 평소 저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냐고 물었더니 ‘그럼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남들 쉬는 날에도 여기 꼼짝 못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 여행 다니면서 노는 걸 보면 대리만족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책은 얼마나 무력한가. 책은, 노동을 하는 동안 별 집중 없이 흘끔거릴 수도 없다. 사방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여기에만 집중하라고 읽는 이의 강력한 희생을 요구한다. 읽는 이에게 가뿐한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좋은 책’은 드물다. 그러니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책을 쓰고 만드는 것이 생업인 사람들은, 이 나날이 살기 팍팍해지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아병동의 어린 환자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병실의 불은 꺼졌지만 복도는 환하다. 나는 겨우 눈을 비비고서 병실 밖 복도의 의자에 억지로 가 앉았다. 급히 챙겨온 책 두 권이 모두 ‘남의 여행기’, 그것도 다른 소설가들의 여행 에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나 역시 본능적으로 대리만족할 대상이 필요하다고 느꼈나 보다. 몸은 한없이 가라앉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정신은 맑아져왔다.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문장에 천천히 줄을 그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돌아갈 것이지만 그 말은 곧 나는 여기 남겨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중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이 어쩌면 인생인 것만 같아서.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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