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꼬박 새가며 ‘응답하라 1988’을 몰아 봤다. 개미허리만큼이나 얄팍한 자제력 탓에 TV를 멀리 하면 뭘 하나.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기 전에는 헤어 나오질 못하니. 아무튼 처음 본 ‘응답’ 시리즈에 나는 빠져들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 나는 올림픽 중계조차 마음껏 시청할 수 없어 짜증나는 고3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88년은 혼란스러운 열기로 들떠 있었다. 도시 미관을 이유로 판자집들이 철거되는 동안 대학생들의 올림픽 반대 데모가 연일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계속되는 고도성장에 올림픽까지 주최했으니 선진국 반열도 멀지 않았다고 흥분했다.
사회분위기야 아랑곳없이 나의 여고시절은 드라마 속의 덕선이네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별밤’에 엽서를 쓰고, 마니또 놀이를 하고, 학교 앞 분식집 ‘하얀집’에 드나들었다. 반지하에 사는 여주인공 덕선이처럼 나도 메이커 브랜드를 한 번도 걸쳐보지 못했다. ‘리복’을 신는 친구가 부러움의 대상이긴 했지만 못 신는다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반에서 대학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절반이 넘어 공부를 못해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국가는 사회안전망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는 서로에게 기댈 여지가 남아있었다. 악착같이 내 몫을 챙기기보다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나누며 살던 이웃이 있어 삶은 견딜 만 했다.
울고 웃으며 15시간을 몰입했지만 약간의 불편함이 남았다. 일부의 비판처럼 ‘응팔’은 ‘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이자 코믹 판타지로 보였다. 폭압적인 시대의 아픔은 슬쩍 치워놓은 채 아름다운 추억만을 걸러낸 지점이 못내 아쉬웠다. ‘응팔’에 열광하는 내 친구는 ‘이 드라마는 개개인이 간직한 소중한 추억들을 모자이크처럼 모아놓은 판타지’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저급하지 않은 판타지 드라마가 있었느냐고, 게다가 그 판타지를 이웃이라는 공동체에 기대어 구현하다니 사랑받을 만하지 않느냐며 옹호했다.
문득 우리 동네 구멍가게 사장님 부부가 떠올랐다. 늦은 귀가 길에 햇반이라도 사러 가면 직접 지은 밥을 몇 공기씩 담아주고, 찾는 게 없으면 당신들 살림살이에서라도 꺼내어 그냥 건네주는 분들이다. 올 가을, 이 분들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터에 집을 지었다. 그 과정에서 상식에 어긋나는 지나친 권리를 주장하는 이웃의 요구를 이 분들은 다 받아들였다. 매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웃인데 얼굴 붉히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이웃을 마주하는 쪽의 방들은 전망을 포기하고 창을 천장에 바싹 붙여 손바닥만 크기로 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알에 300원인 계란 네 알을 집은 내가 1,000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사장님은 1,000원짜리 한 장만을 집으며 “200원은 디스카운트야”라며 웃었다. “아니, 1,200원에서 200원 빼주면 뭐가 남아요?” “그래도 남으니까 걱정 말아요.” “매번 이런 식이시잖아요.” “그래야 남아요.” 그래야 남는다는 것. 그게 바로 남는 거라는 것. 그 믿음은 사장님 부부가 30년 넘게 구멍가게를 하는 동안 평생 잃지 않은 삶의 고갱이였다. 눈앞의 이익에 아득바득 매달리기 보다는 ‘복으로 돌아오면 좋고, 안 돌아와도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온 이 분들은 ‘응팔’ 속의 그 이웃이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언제나 만만치 않았고, 현실은 늘 고달팠지만 골목마다 이렇게 살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밝힌 희미한 빛에 기대어 그 어둡던 시절에도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지금부터 30년이 흐른 후 이 동네에 살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어떤 추억이 먼저 떠오를까? 시위가 있는 날이면 길목마다 막아선 경찰에게 검문검색을 당하던 불쾌한 기억보다는 ‘이제 들어와요?’라며 환하게 웃던 사장님 부부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지금 우리도 먼 훗날 판타지가 될 수 있는 추억을 하나하나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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