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고사 폐지 후 영어 내신 반영
만점자 많으면 외고 준비생에 손해
중3 시험 어렵게 내거나 실수 유도
대다수 학생을 줄세우기 들러리로
“불합리한 제도… 입시 개선해야”
서울 노원구의 공립 중학교에서 3학년 영어를 가르치는 김형준(31ㆍ가명)교사는 지난 9월 중간고사 직후 호되게 곤욕을 치렀다. 교과서를 바탕으로 출제한 시험에서 전체 290명 학생 가운데 50명이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 교사는 “‘만점자가 많아 1등급이 나오지 않았다’는 일부 외국어고 준비생과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며 “교감 선생님도 ‘외고 준비 학생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출제하라’고 주의를 줬다”고 털어놨다. 어쩔 수 없이 기말고사 난이도를 대폭 높여 출제한 김 교사는 “일부 학생을 위해 대다수 학생들이 중학교 때부터 터무니없이 어려운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게 옳으냐”고 반문했다.
10일 교육계에 따르면, 전국의 외고 신입생 선발이 이달 초 마무리된 가운데 교육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외고 입시 제도로 인해 중학교 영어 공교육 현장이 쑥대밭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고 진학을 희망하는 최상위권 학생을 위한 ‘등급 줄세우기’로 학교 시험의 난이도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 입시 제도하에서 외고 준비생들이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려면 중학교 3학년 영어 내신 1등급을 받아야 한다. 교육부가 지난 2010년 각 외고 별 자체 선발 고사를 폐지하고 중학교 영어 내신 성적과 자기소개서, 면접만 입시에 반영하도록 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 영어 내신은 중학교 2학년 성적을 절대평가(90점 이상 만점)로, 3학년 때 성적을 상대평가(1~9등급 차등 점수)로 활용하도록 하면서 3학년 영어 내신 등급이 합격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중학교 교과 과정에 입각해 출제한 문제로는 등급을 나누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이 때문에 고교나 대학 수준의 단어를 출제하거나 실수를 유도하는 문제를 내는 파행도 잇따르고 있다. 실력이 아닌 실수를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인 것이다. 서울 을지중 손지선 영어교사는 “학생들의 평균적인 영어 실력이 높아져 중학교 3학년 성취기준에 따라 문제를 출제하면 만점자가 수십명 나올 수밖에 없다”며 “변별력을 내기 위해 지엽적인 부분에서 기술적으로 실수를 유도하는 형태의 문제를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구의 한 중학교 영어교사는 “교과서에서 벗어난 자료에서 문제를 내면 선행학습금지법 위반으로 비난 받고, 교과서에 충실하게 문제를 내면 외고 진학 실적을 떨어트리는 무능한 교사로 낙인되는 상황”이라며 외고 입시 제도의 모순을 비판했다.
다수 일반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는 점도 문제다. 손 교사는 “외고를 준비하는 최상위권 학생은 한 학교당 적게는 정원의 1~2%, 많게는 10%정도밖에 안 된다”며 “등급 점수가 필요 없는 대다수의 일반 고교 진학 학생들이 외고 준비생을 위해 어려운 시험을 감수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천호중 송형호 영어교사는 “지난 몇 년간 영어교사들이 중학교 3학년 담당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져 학교마다 3학년 영어 교사를 배정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고 덧붙였다. 입시전문가인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전 과목 내신 성적을 반영하면서 영어 과목에 가중치를 두는 등 제도 개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