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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견문록/도깨비 전설로 다시 태어난 안흥찐빵마을

입력
2015.12.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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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쪄낸 찐빵을 맛볼 수 있는 강원 횡성군 안흥찐빵마을은 주말이면 전국의 미식가들이 찾는 명소다. 이 마을 찐빵은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반죽을 자연 발효시키는 등 50년 전 전통방식으로 빚는다. 횡성군 제공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쪄낸 찐빵을 맛볼 수 있는 강원 횡성군 안흥찐빵마을은 주말이면 전국의 미식가들이 찾는 명소다. 이 마을 찐빵은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반죽을 자연 발효시키는 등 50년 전 전통방식으로 빚는다. 횡성군 제공

영동고속도로 새말 나들목(IC)를 나와 42번 국도를 따라 평창 방면으로 20여분 가량 차를 달리다 보면 작은 시골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 닿으면 정겨운 모습의 찐빵 캐릭터가 활짝 웃으며 관광객들을 반긴다. 초입에 놓여 있는 정자도 이름도 ‘찐빵마을 정자’.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가 가마솥 뚜껑을 열자 둥근 찐빵들이 내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이쯤 되면 초행길인 여행객도 이곳이 횡성군 ‘안흥찐빵마을’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안흥찐빵마을에서 성업 중인 업소는 17곳. 어떤 이는 쫄깃쫄깃한 밀가루 빵 속 가득 들어있는 달콤한 팥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맛을 잊지 못해, 또 어떤 사람은 겉모습은 투박하지만 깊은 맛을 낸다는 입소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주말이면 찐빵가게에 긴 줄이 늘어서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찐빵이라는 소박한 먹을 거리 하나로 작은 시골마을이 전국적인 명소가 된 셈이다. 경기 성남시에서 온 진형준(49)씨는 “이곳 찐빵을 맛보면 어릴 적 30원짜리 찐빵을 하나 사 형님과 반씩 나눠 먹던 생각이 난다”며 “패스트푸드나 일반 제과점 빵하고는 확실히 다른 맛”이라고 회상했다. 이렇듯 이곳에선 맛과 추억을 동시에 선물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안흥찐빵은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만든다. 먼저 국내산 팥을 4시간 이상 푹 삶아 소를 만든다. 밀가루는 막걸리와 계란으로 반죽한 뒤 숙성시킨다. 숙성된 반죽을 동그란 빵 모양으로 빚은 뒤 팥을 넣어 따뜻한 아랫목에서 다시 한번 숙성과정을 거쳐 가마솥에 쪄내는 레시피는 50년 전 그대로다. 17년째 찐빵가게를 운영하는 김인기(51) 안흥손찐빵협의회장은 “안흥찐빵은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고 전통방식 그대로 만든 것이 특징”이라며 “깊은 정성을 담아 예전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찐빵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먹거리. 쌀쌀한 날씨에 두 손 번갈아 쥐고 호호 불어가며 한 입씩 베어 먹었던 기억이 아련한 겨울철 대표간식이다.

안흥찐빵을 빚는 손길도 지금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찐빵마을 가게들의 1년 매출 가운데 40% 가량이 겨울철에 발생한다. 이 마을에선 100여 명의 어르신이 찐빵을 만든다. 아랫목에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빵을 빚어 부수입까지 생기니 여느 농촌마을과 다르게 농한기에도 활기가 넘친다. 김 대표는 “1개당 400원 정도하는 찐빵이 마을주민들의 가정경제를 떠받치는 효자”라며 활짝 웃었다.

안흥찐빵마을의 유래는 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추운 날씨 탓에 안흥에서는 벼 재배가 어려워 대부분 농가가 밭 작물인 팥을 길렀다.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흔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막걸리 집 15곳이 두 재료를 결합, 밀가루 반죽에 팥 앙금을 넣은 찐빵을 팔기 시작했다. 안흥찐빵 맛의 비결인 막걸리 반죽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시래기 된장국과 함께 먹는 5원짜리 찐빵 하나는 서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웠다. 찐빵은 모내기를 하거나 추수를 할 때,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날 같은 마을 행사에 빠지지 않는 새참이었다. 주민 김현욱(73)씨는 “어른주먹 크기의 찐빵 두 개면 뱃속이 든든했다. 옛날 시골에 이만한 먹을 거리도 없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지리적인 요인도 안흥찐빵이 전국에 알려지는데 한몫 했다.

안흥은 영동고속도로가 뚫린 1975년 이전까지 강원도 영서와 영동지방을 잇는 길목이었다.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와 강원도 고랭지채소를 운반하는 트럭, 평창 대화, 봉평 장터로 향하는 상인들은 안흥을 휴게소 삼아 잠시 쉬어갔다. 치악산을 오르는 등산객들도 안흥에 들러 한숨을 돌렸다. 당시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는 안흥찐빵은 이들을 통해 자연스레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에 알려졌다.

영동고속도로 개통 이후 잠시 쇠락했던 안흥찐빵이 ‘히트상품’이 된 때는 1990년대 중ㆍ후반. 작은 찐빵가게가 언론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열아홉 꽃다운 청춘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와 호떡장사 등 온갖 행상을 하다 안흥에 찐빵 가게를 차렸다는 어느 할머니의 인생담이 더해지면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찾아온 ‘복고열풍’으로 안흥찐빵의 주가는 더욱 치솟았다. 당시 언론은 ‘한국전쟁 직후 배고팠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 IMF경제위기는 별거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자주 전했다. 이때 안흥찐빵이 어려움을 이겨냈던 고난극복의 음식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돼 버렸다. ‘찐빵하면 안흥’이라는 공식 같은 말도 이때 생겨났다. 이렇게 안흥찐빵은 한우, 더덕과 함께 강원도 횡성을 대표하는 특산물이 됐다. 안흥찐빵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잘 나가던 안흥찐빵마을에 위기가 닥친 때는 2009년. 찐빵 제조방법을 놓고 고소, 고발전이 벌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진품 안흥찐빵이 손 찐빵이냐 기계찐빵이냐’ 하는 다툼이었다. 1999년 10월 첫 선을 보인 후 한 때 10만 명 가까운 관광객을 불러 모았던 축제도 2012년부터 열리지 못했다. 여기에 지리적 상표등록 분쟁이 더해지면서 이미지 추락을 불러왔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먹을 거리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매출이 급락했다.

지난 10월 도깨비 전설을 테마로 4년 만에 다시 열린 안흥찐빵축제에는 전국에서 10만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가 안흥찐빵마을의 재도약을 알렸다. 횡성군 제공
지난 10월 도깨비 전설을 테마로 4년 만에 다시 열린 안흥찐빵축제에는 전국에서 10만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가 안흥찐빵마을의 재도약을 알렸다. 횡성군 제공

올해는 안흥찐빵마을 사람들에게 어느 때보다 특별하다. 주민갈등이 봉합되면서 10월 4년만에 축제를 다시 열었기 때문이다. 횡성군과 찐빵축제 조직위는 홍보를 위해 안흥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토대로 한 스토리도 만들었다.

전설은 이렇다. 장난꾸러기 도깨비 삼형제가 안흥의 옛 지명인 실미(實美)를 넘어가는 길목에서 지나는 길손의 먹거리를 빼앗았다. 이에 당시 마을 현감이 팥을 먹이면 귀신에게 해롭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손들에게 술 떡 안에 팥을 넣어 다니게 했다. 팥이 든 떡을 빼앗아 먹은 도깨비가 바위로 변해 삼형제 바위가 됐다. 도깨비가 사라지자 이 고장 이름이 ‘편안함이 절로 인다’라는 뜻의 ‘안흥(安興)’이라 불리게 됐고, 안흥찐빵은 모든 길손이 간식거리로 가지고 다닌 필수품이 됐다는 얘기다.

맛과 재미있는 전설이 더해진 축제는 찐빵마을 재도약의 신호탄이 됐다.

횡성군의 집계 결과, 올해 축제에 10월 초 사흘간 열린 축제에 10만5,000여 명이 다녀갔다. 찐빵이 불티나게 팔렸고 식당, 농산물판매장 등 다른 점포들의 매출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로 인한 경제효과는 71억8,400만원. 빵모자를 쓰고 축제장을 찾는 방문객에게 찐빵 값을 깎아주는 이벤트와 손으로 빚는 전통 찐빵제조방식을 체험하는 자리를 만들어 호응을 얻었다. 남홍순(56) 안흥찐빵축제위원장은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찐빵축제를 강원도를 대표하는 이벤트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횡성=박은성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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