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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페미니스트 신문 ‘라 프롱드’ 창간

입력
2015.12.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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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2월 9일

최초의 페미니스트 신문 '라 프롱드' 1899년 1월 1일자
최초의 페미니스트 신문 '라 프롱드' 1899년 1월 1일자

1897년 12월 9일 프랑스 파리에서 일간 ‘라 프롱드(La Fronde)’가 창간했다. 르 피가로 기자 마거리트 듀랑(Marguerite Durand, 1864~1936)이 창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최초의 페미니스트 신문이었다.

듀랑은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던 프랑스 중산층 출신 여성이었다. 수녀원에서 공부한 뒤 파리 콘서바토리(파리 국립고등예술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코메디 프랑세즈(프랑스 국립극장)에서 배우로 일했다. 그가 연극을 그만둔 것은 24살이던 88년 변호사 조르주 라귀에르(Georges Laguerre)와 결혼하면서였다. 정치 지망생으로 반의회주의자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의 극우 애국주의 그룹 일원이던 라귀에르는 듀랑에게 불랑제 지지 팸플릿 등을 쓰게 했고, 듀랑은 연기보다 저널리즘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써야 했던 글은 그의 가치관과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둘은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짐작할 만한 이유로 3년 만에 이혼했다.

프랑스 여성인권운동가이자 '라 프롱드' 창간 발행인 마거리트 듀랑.
프랑스 여성인권운동가이자 '라 프롱드' 창간 발행인 마거리트 듀랑.

이혼 후 듀랑은 배우로 분장하고 무대에 서는 대신, 르 피가로 기자로서 현실 권력자들의 분장을 벗기는 일을 시작했다. 보수적 논조의 피가로가 그의 들끓던 분노를 얼마나 넉넉히 수용했는지 역시 미지수다. 1886년 국제페미니스트의회 취재를 맡았던 이듬해인 1897년 12월 그는 직접 신문사를 차린다. 일간지 ‘라 프롱드’였다.

라 프롱드는 기사 작성서부터 기획, 편집, 제작에 이르는 신문 제작 전 과정을 100% 여성 인력으로만 수행한, 전위적인 신문이었다. 듀랑은 그가 기사로써 추구한 여성 참정권 등 인권ㆍ평등 이슈뿐 아니라, 남성이 지배하는 저널리즘 세계에서 여성의 역량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신문으로써 보여주고자 했다. 창간호 사설에서 그는 “프롱드는 ‘반 남성’ 신문이 아니다.(…우리는) 학대와 편견, 낡은 관습과 자의적 법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3일자 사설에서는 “종교 인종 불문, 전 여성의 연대를 통해(…) 무지와 동물 학대, 아동 학대, 알코올 중독…, 가족과 도시를 파괴하는 온갖 완고한 탄압과 박해들에 대한 성전을 호소”했다. 전성기 독자가 5만 명에 달했다지만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했고, 라 프롱드는 1903년 10월 월간지로 전환했다. 월간 ‘랙시옹(L’Action)’은 1905년 3월까지 나왔다.

듀랑은 신문 발행과 별도로 20세기 초 프랑스의 다양한 여권운동 주역으로 활약했고, 의회 선거에 여성후보를 내기 위해 조직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31년 자신이 발행하고 수집한 신문 등 페미니즘 역사의 중요한 자료 일체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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