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공동체를 꿈꾸다] 13. 대전 백북스
혁명은 세계를 거듭나게 하는 일이다. 진부함에서 참신함으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세계의 중심축을 옮겨 간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피로 이루어지는 혁명 이전에 세상의 법을 다시 쓰는 혁명이 선행하고, 세상의 법을 다시 쓰는 혁명 이전에 텍스트를 반복해서 읽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타루는 말한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2002년 6월 월드컵 열풍이 불었다. 말 그대로 뜨거운 바람이었다. 거리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목청을 돋우어 축구를 응원했다. 거대한 카니발이었다. 억압의 폭발이자 자유의 확인이었다. 민중의 소멸이자 다중의 출현이었다. 소위 ‘월드컵 세대’의 혁명적 등장이었다. 그로부터 열네 해가 지났다. 축제는 끝나고 열광은 주저앉았다. 다중의 힘을 찬양하던 입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월드컵은 과연 혁명이었을까?
같은 시절, 대전에서 작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수만 명이 몰려들어 고함치는 거리를 홀연히 버려두고, 대학교수 대여섯명과 학생 스무명 남짓이 강의실에 둘러앉았다. 손에는 잭 웰치의 ‘끝없는 도전과 용기’가 있었다. 100권독서클럽의 첫 자리였다. 두 주에 한 권씩 책을 읽으면 한 해 25권, 대학 졸업 때까지 100권은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붙인 이름이었다. 한남대 현영철 교수와 강신철 교수가 모임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제자들의 ‘독서 스펙’을 만들어 주려는 동기가 있었다.
기업은 늘 아우성이다. 책을 읽지 않은, 아니 읽지 못하는 학생들을 멀쩡히 졸업시키는 대학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단지 지식 탓은 아니다. 지식은 시험을 통해 체크할 수 있다. 문제는 학습 능력이다. 대학까지 배운 지식의 대부분은 졸업해서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유효성을 잃는다. 지식정보 사회에서는 혁신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관습에 따른 삶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낡은 지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지식으로 옮겨가면서, 내면에 지혜를 축적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따라서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학습 자체다. 배우는 능력이다. 배우는 능력은 읽기를 마음과 몸에 붙이는 방법 말고 키우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성인의 문해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최하위권인 이 나라에서 기업이 난독증 학생을 대량 배출하는 대학을 비난하는 건 당연할 뿐이다.
전국으로 확산… 국내 최대 독서공동체로
진짜 혁명은 사소한 차이로부터 비롯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생한테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고, 학생과 같이 책을 읽겠다고 나선 스승의 솔선은 예기치 못한 변화를 불러왔다. “대학 졸업 후 전공 서적만 읽다가 교양 서적을 읽자니 2주일에 1권도 부담되었지만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백북스 홈페이지에 올린 강신철 교수의 고백이다. ‘쏠쏠’은 읽기 중독의 첫 단계다. 쏠쏠한 일 중에서 우리가 쉽게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제자보다 스승의 몸에 먼저 책이 붙어버린 것이다. 쏠쏠함조차 없었다면 어찌 견뎠을까. 공동체가 터를 잡을 때까지 걸린 기나긴 세월을. “(총무하고) 단둘이 나와 아침을 먹으며 토론하기도 했고, 토론자하고 셋이서 토론하는 날도 있었지만 건너뛴 적은 없다. 토론자 없이 혼자 하더라도 독서 끼니를 굶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쏠쏠함에서 끼니로, 행간에 숨긴 마음고생이 절절하다.
오늘의 백북스는 국내 최대의 독서공동체 중 하나다. 대전에만도 회원이 350명에 이르고, 정기 모임에도 40명 정도는 넉넉하다. ‘인문고전 읽기’ ‘사진과 인문학’ ‘생물학 소모임’ ‘수학아카데미’ 등 갈라져 따로 책 읽고 공부하는 소모임만도 열 군데 가깝다. 아방가르드 예술을 공부하는 ‘당장 만나 프로젝트’ 같은 신기한 명칭의 모임도 있다. 대전이 전부가 아니다. 서울, 인천, 충북에서도 백북스는 별도로 모임을 잡아 열린다. 시민들이 자립적으로 이룩한 지식 생산 및 공유의 대명사로 성장했다. 모임은 창립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지금은 매달 둘째, 넷째 화요일 오후 7시15분에 모인다. 횟수가 벌써 300회를 훌쩍 넘겼다. 온라인 회원도 전국에 1만 5,000명가량이나 된다. 박성일 상임대표가 말한다.
“서울과 달리 대전과 같은 지방 도시는 농축된 지식을 짧은 시간에 흡수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습니다. 저희는 단지 책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저자를 초청해 강의를 듣거나 발제자를 정해서 발표하도록 한 후 토론합니다. 저자한테는 너무 대중적으로 풀려고 하지 말고 내용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충분히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토론자 역시 책을 요약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말고 관련 분야의 책을 함께 섭렵해서 수준 높게 연구한 후 발제하도록 합니다. 발제는 충분한 시간을 주고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하고 토론하는 진지한 모임
백북스 모임에서 가장 특이한 건 ‘연구하는’ 내부 발제자다. 대덕 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의 특수성이 아니면 좀처럼 이루기 힘든 요소다. 아파트 마당에서 “김 박사!”하고 소리치면 한 층에 한 사람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다는 곳이다. 한 해쯤 지나 100권독서클럽이 자리 잡을 무렵, 외부 초청 토론자가 모임 취지에 공감해서 회원이 되는 일이 자주 생겨났다. 교수-학생 독서 모임에서 시민 독서공동체로 확산되는 성장기로 접어든 것이다. 박학다식한 박문호 박사가 모임에 참석해 토론을 주도하면서 활동의 품이 커졌다. 그러자 과감하게 학교 담장을 넘어 연구단지 안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 연구원들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다들 책에 목말라 있었다. 외부 토론자를 섭외하기 어려운 번역서도 한 해 여덟 번 정도 수준 높은 내부 발제가 가능한 것은 독립 연구 능력을 갖춘 풍부한 인력 덕분이다. 백북스 이정원 이사가 말한다.
“저도 연구원입니다. 사실, 저는 책 읽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나오기 시작했죠. 모임에 나오고 나서야 책이라는 세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좋아졌어요. 게다가 모임 관련 활동을 하면서 발표 스킬도 늘어났습니다. 회사 홍보팀에서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이정원 이사는 뇌과학을 이용해 예술과 무의식의 비밀을 풀어낸 ‘통찰의 시대’를 연구 발표했다. 그 내용이 아주 좋아서 서울백북스 등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강연을 했다. 이 책은 어쩌면 하나의 작은 상징과도 같다. 과학과 인문학을 균형 잡는 게 백북스의 주요 목표이기 때문이다. 책을 선별할 때 과학책을 40%가량 배정해서 과학적 사고의 확산에 기여하려 한다. 대덕과 대전의 분리를 극복하는 데도 이런 선정이 도움이 된다. 박성일 대표가 말한다.
“책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읽는 겁니다. 열여섯 살 때 마르고 왜소해서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책이라도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웃음) 과학을 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감상적 인문학은 사절입니다. 세계를 합리적이고 심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어야 읽는 사람도, 그가 속한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목소리에 열정이 묻어난다. 방 안 가득 진한 다향이 퍼져 간다. 청량한 향기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심신을 어루만진다. 조수윤씨가 말한다.
“중학교 때부터 독서클럽을 했습니다. 직장에 들어간 후 끊어졌다가 백북스 이야기를 듣고 6년 전부터 나왔습니다. 경제경영 소모임에 처음 참여했다가 점차 다른 모임에도 발을 들여놓았죠. 전공이 경제학이라서 모임에 나오기 전에는 세상이 전부 돈으로 보였습니다. 모임에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서 ‘독서 편식’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다른 삶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르네상스적 인간을 꿈꾸며
문학, 예술, 인문, 사회, 과학 등 모든 분야의 앎을 한몸에 담은 르네상스적 인간이 백북스의 지향이다. 모든 책은 저마다 세계를 담고 있다. 책을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자기 안에 초대하는 일이다. 온 세계를 모으고 쌓아서 자신의 세계를 새로 쓴다. 자기 자신을 다시 세운다. 이근완씨가 말을 보탠다.
“여기 올 때마다 감명을 받고 갑니다. 제 삶의 나침반이 되는 모임입니다. 저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삶의 지침이 되는 어른을 비로소 보았다는 기분입니다. 인생의 멘토를 만났습니다.”
무형의 지식을 시민들의 손으로 농축하고 집약해서 파종한다. 곁뿌리에서 또다시 새파란 싹들이 올라온다. 싹이 다시 자라 씨를 퍼뜨리면서 대전 속에 지식 문화의 힘찬 통로들이 퍼져간다. 서울에, 인천에, 충북에 새로운 땅에 접붙인 지식의 식물들이 뿌리를 내린다. 백북스가 지난 열네 해 동안 이룩한 혁명이다. 박성일 대표의 말이 쩌렁쩌렁 허공을 울린다.
“대전을 보스턴 같은 지식 문화도시로 만들고 싶습니다. 읽기가 그 일을 해낼 겁니다. 사람은 그 시대의 최고 지식을 접하면 반드시 바뀝니다. 시민들이 우리 시대의 최고 지식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자리를 영원히 유지하고 싶습니다.”
◆백북스가 추천하는 과학책
과학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이들에게 ‘내 아이와 함께한 수학일기’를 권하고 싶다. 수학 박사가 아들 딸 친구들한테 수학을 가르친 기록을 담은 일지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토론식 교육의 중요성, 학습의 즐거움, 인간 모두 안에 내재한 창의성을 볼 수 있었다. 번역자가 자기가 쓴 책보다 더 사랑해서 인상적이었다.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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