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데모께나 했던 사람이다. 군부독재 시절인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함성과 구호가 있었고 SY44 최루탄과 흔히 사과탄이라고 불렀던 KM25, 그리고 지랄탄이란 별명이 붙은 다연발탄, 페퍼포그가 있었다.
그거 종류별로 다 맞아봤다. 다리에 직격탄을 맞아 며칠 절뚝이며 다녀야 했고(허공으로 쏴야 하는데 종종 사람을 직접 겨냥 했다. 이것을 맞고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죽었다) 지랄탄에 당해 헛구역질을 하며 몸이 무력해지는 것을 맛보기도 했다. 한 번은 경찰들과 맞붙었다가 사과탄 예닐곱 발을 동시에 맞은 적도 있었다.
독하기로는 사과탄이 최고였다. SY44는 그럭저럭 시야가 확보됐는데 사과탄 최루가스는 아예 눈이 멀고 호흡이 멈출 정도였으니까. 그때 죽을 곤욕을 봤다.
파편에 얼굴과 손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데다 눈도 떠지지 않는 상황에서 쫓아오는 백골단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잡히기 직전 어떤 서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셔터가 거의 내려가 있는 상태라서 가까스로 슬라이딩 하며 들어간 것이다. 신발도 벗겨져있었다. 곧바로 주인이 닫고 잠갔다. 끙끙 기다시피 이층 계단을 타고 올라가 쓰러져 가쁜 숨을 내몰았는데 한참 뒤까지 백골단들이 셔터를 곤봉으로 치고 발로 차대는 소리가 들렸다. 서점 주인이 아니었으면 엄청 당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거리로 몰려나간 87년 유월항쟁 때였으니 나는 그저 많은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때의 함성과 열기 덕에 우리 사회는 민주화 쪽으로 다가갔고 조금은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요즘은 어째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 기분이 들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집회와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찰과 싸우고 싶은 마음 없다. 나는 다칠 게 뻔하고 상대도 다칠 수 있는데 그게 좋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시절 제 일선에서 방패를 들고 서있는 전투경찰들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단지 병역 때문에 전투경찰에 들어갔고 명령에 따라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인데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파쇼집단에 의해 이 땅의 젊은이들이 두 패로 갈려 서로 치고 박고 싸워야 하는 상황, 그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멀쩡한 남의 집 아들을 고생시키는 모습, 그 현실이 참담했다. 내 눈에는 독재세력이 징병제를 이용해 어린 친구들을 자기들의 사병(私兵)처럼 사용하는 걸로 보였으니까.
집회와 시위는 주변에게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행동이다. 부조리, 불합리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것. 국민의 정당한 권리이고 그것은 지금 야당을 하고 있는 정치집단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대로 통용되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언론을 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뉴스에 나오니까.
이제 복면을 쓰고 시위하는 사람을 검거해서 처벌받게 하겠단다. 경찰의 폭력은 그대로 두고 일부 시위대의 폭력에만 초점을 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위 도중 폭력성이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정직한 접근인데 말이다.
복면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발암물질인 디클로메탄이 들어 있는 CS최루액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경찰의 캠코더 촬영에 침해 당하는 초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최루가스는 염소와 브롬 화합물을 주성분으로 하는데 브롬은 남성의 정자수를 감소시키며 여성의 불임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그걸 물에 탄 것이 최루액이다. 최근에는 파바 최루액이라는 것으로 바꿨다는데 이것의 안정성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이제는 시위대는 물론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현장에서 복면을 썼던 경찰들도, 조계사 앞에서 얼굴 가리고 집회를 했던 보수단체 회원들도 검거될 것이다. 어쩌면 복면 가왕 가수들과 마스크 쓰고 운동하는 아줌마, 목도리로 얼굴을 둘둘 말은 아가씨들까지도.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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