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태풍과 봄바람이 공존했다. 태풍이 밀어닥치다가도 몇 분 만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봄바람을 부른 건 나였고, 광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언니였다. 언니와 아버지가 마주치면 천둥이 치고 폭풍이 몰아쳤다. 심할 땐 하루에도 몇 번씩.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언니, 이유가...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언니와 아버지의 갈등이 본격화했다. 말 그대로 날마다 전쟁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 사람이 마주치기만 하면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가 났다.
아침에는 치마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언니는 미니스커트 마니아였다. 아버지는 언니가 짧은 치마를 입고 나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갈등의 결론은 회초리였다. 아버지는 대나무로 오금 위를 때렸다. 자국이 남으면 짧은 치마를 못 입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다 언니가 묘안을 냈다. 치마를 가방에 넣어서 학교에 간 것이었다. 학교 화장실에서 바지를 벗고 치마로 갈아입었다. 나름 훌륭한 전략이었다. 그 뒤로 치마 전쟁은 끝이 났으니까.
저녁엔 통금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정한 통금 마지노선은 9시 5분이었다. 그 시간은 언니에게 있어 ‘초저녁’이었고, ‘놀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통금을 지킬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언니를 찾아 나섰다. 학교 앞 술집에서 동네 어귀 식당까지, 수색대가 따로 없었다. 처음에는 곧잘 발각되어서 집으로 끌려왔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의 말마따나) ‘베트콩처럼’ 꽁꽁 숨었다. 하지만 언니가 아무리 멀리 뛰어도 나는 아버지를 당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출정했다 하면 열 번 중에 아홉 번 정도는 언니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너무 분해서 눈물을 찔끔거렸고, 마스카라가 번져 눈 주위가 시커멓게 변했다. 나는 사냥꾼에게 잡혀온 너구리가 연상돼 언니 몰래 킥킥, 웃었다.
아버지는 미팅ㆍ소개팅에도 출동했다. 멀리서 ‘어떤 놈들’이 나왔는지 확인했다. 때로 소개팅 상대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내 딸 잘 부탁하네. 그리고 참고로 말하는데, 통금은 9시라네.”
아버지의 기세에 상대 남자는 바짝 위축됐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태권도 사범을 했기 때문에 체격이 당당했고, 손힘도 만만찮았다. 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와 악수를 하면 아무리 당당한 남자도 ‘노트르담의 곱추처럼’ 몸이 쭈그러들었다.
한번은 언니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통보’하고 전화를 톡, 끊었다. 아버지는 발끈했다.
“MT도 못 갔는데, 친구들하고 하룻밤만 자게 해줍시다. 모르는 애들도 아니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붙잡았지만 “고마 됐다!” 하고 단칼에 뿌리치고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가 언니를 데려왔다. 이번에도 너구리 눈이 된 언니는 아버지가 나간 뒤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집밖에서 자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네. 여군에 입대하거나, 결혼하거나…….”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결혼의 가장 큰 이유는 ‘자유’였다. 언니가 시집을 가고 난 후 우리 집의 부녀 전쟁은 끝이 났다. 봄날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막 졸업할 즈음이었다.
“내가 영아 때문에 산다!”
언니와 달리 아버지와 나는 마음이 척척 잘 맞았다. 부녀지간에 비슷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모임에 참석하면 아버지는 늘 마이크를 잡았다. 워낙 달변이라 사람들이 어김없이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맡겼다. 마이크를 잡으면 노래 한 곡조는 기본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많이 불렀던 곡은 나훈아의 ‘사랑’이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부르는 데다 외모도 나훈아와 무척 닮아서 좌중의 호응이 대단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아버지가 한곡 ‘불러제끼고’ 나면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유치원과 초등 시절에 아버지 ‘무대’의 특별 게스트로 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나훈아에 짝을 맞춰 주현미를 대령했다. 내가 엉덩이를 흔들면서 노래를 끝내고 나면 언제나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게런티도 쏠쏠했다. ‘관객’들이 으레 천 원이나 오천 원짜리 한 장씩을 쥐어주었다.
“내가 영아 때문에 산다.”
아버지가 습관처럼 하셨던 말이었다. -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했던 언니와는 얼마나 달랐던지!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용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벌었다. 나는 유치원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 선생님을 따라가 예식장에서 반주 알바를 했다. 하루에 5번이나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연주비가 쏠쏠했던 덕에 어머니에 손을 벌릴 일이 없었다.
내가 용돈을 직접 벌어야 할만큼 집안이 힘들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제법 큰 섬유회사의 간부였고 나름대로 ‘지역 유지’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집안이 어려워진 건 IMF가 터지던 해였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 즈음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가 기울어졌다. 피아니스트의 꿈도 접었다. 일반대학으로 진학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나운서’라는 꿈을 찾긴 했지만, 자의가 아니라 주변의 환경 때문에 삶의 진로를 변경해야 하는 아픔은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아버지다웠던 시절
IMF 시절을 통틀어 가장 쓸쓸했던 기억은 추석 때 텅 비어있던 거실 풍경이었다. 아버지가 섬유회사 이사로 재직할 때만 하더라도 거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에는 소포가 단 한 개도 오지 않았다. 온 세상이 우리만 빼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서운한데 아버지는 얼마나 세상이 미울까. 어린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나에겐 그 시절이 결코 쓸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어둠이 짙어지면 별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그 암흑 같은 시간에도 아름다운 추억들이 흩뿌려져 있다. 그때 우리 중에서 가장 빛났던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IMF 시절은 가장 뜻밖의 시기였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이신 시간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문을 닫은 후, 아버지는 사무실 책상을 가져와 안방에 들여놓았다. 책상에 붓과 벼루, 화선지를 놓고서 하루 종일 붓글씨를 썼다. 집에 돌아와 보면 으레 한문 책을 보거나 먹을 갈고 있었다. 회사에 나가지 않는 것 외에는 평소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하루는 내가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다시 회사에 나갈 거죠?”
내 말에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시 나가야지. 오라는 데가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밥을 짓고 있으면 아버지는 나지막하지만 심지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끄떡없다. 걱정하지 마라.”
술을 즐기는 분이었지만 한번도 술을 못 이길만큼 마신 적이 없었다. 술을 드신 날에도 비틀거리거나 걸음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집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말 그대로 ‘끄떡없이’ 질곡의 강을 건넜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그 시절에 대한 고백을 직접 들었다. 아버지의 칠순 잔치 때였다. 그날 내가 사회를 봤고, 아버지는 마이크를 들고 ‘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구구한 이야기를 다 접고 짧지만 깊은 몇 마디를 내놓으셨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칠십 평생을 관통하는 회고라고 생각한다.
“벌써 칠십, 인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젊은 시절 제 자신과의 약속을 몇 가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힘든 때도 많았지만, 별로 어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서 ‘끄떡없이’ 든든한 기둥 노릇을 하시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셨는가를 실감했다. IMF로 직장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지만 한번도 낙담해서 쓰러지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단단하셨던 모습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자란 덕일 것이다. 나도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넌 어째 힘든 일이 있어도 늘 평상시처럼 꿋꿋하냐?”하는 이야기 듣곤 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다 우리 아버지 덕분이죠!’
언니의 고백 “난 우리 아빠가 너무 좋다!”
그런데, 칠순 잔치에서 아버지의 고백에 눈물을 가장 많이 쏟았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언니였다. 뒤풀이에서도 언니가 아버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온갖 애교를 다 부렸다.
“나는 우리 아빠가 너무 좋아. 아빠하고 난 너무 잘 맞는다.”
언니가 나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같이 살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 아빠가 최고더라. 다른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자기 아버지하고 추억이 없더라. 너도 알겠지만 나하고 아빠는 추억이 너무 많잖아? 딸 소개팅 하는 데까지 찾아와서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고 돌아간 아빠가 대한민국에서 몇이나 될까.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까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했는지 알겠더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언니와 아버지는 서로 많이 닮았다. 두 사람이 부딪친 것은 달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닮은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을 물려받았지만 언니의 DNA에는 아버지의 춤과 노래가 스며들었다. 언니는 학교 다닐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세상 무엇보다 좋아했다. 아버지도 풍류에 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분이고 사람을 좋아해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의리주의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언니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어받았다.
언제부턴가 명절 때 아버지의 술친구도 사위나 아들이 아닌 언니다. 어머니는 “부녀지간에 잘한다.”고 지청구를 날리지만 두 사람은 마음이 찰떡처럼 맞아서 한쪽에 술상을 펴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너 어떻게 이렇게 술을 잘 마시냐?”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말하면 언니는 아버지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렇게 화답을 한다.
“그거야 아빠 딸이니까 그렇지!”
‘아빠가 너무 싫어서’ 결혼한 언니는 이제 없다. 어느새 막내딸인 나보다 더 막내 같은 언니가 되었다.
*
언니와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씩을 아버지의 유산으로 나누어 가졌다. 언니는 누구도 갖지 못한 추억을 가져갔고,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대범한 정신을 가져왔다. 그것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자연스럽게 우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버지가 우리 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 대신 노래 한 곡을 들려주고 싶다.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우리에게 아버지는 비 오는 날의 우산이었고, 겨울에 마당 한켠에 피운 따뜻한 모닥불이었다. 나는 아버지 덕에 궂은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졌고, 언니는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갈 모닥불처럼 따뜻한 추억을 얻었으니까.
이제는 언니와 내가 아버지에게 우산과 따뜻한 모닥불이 되어드려야 할 차례다. 아버지처럼 잘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서툴더라도 열심히 노력해야지.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내 아버지니까. *
김광원 기자
◆ 김영아
TBC에서 월~금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진행되는 ‘가요에세이’(99.3MHZ) DJ를 맡고 있다. 햇수로 4년째다. 그동안 수많은 가요와 사연을 접하고 소개하면서 가요와 삶을 ‘읽는’ 내공을 키웠다. ‘목소리만으로도 위로를 주는’ 최고의 DJ가 되기 위해 성우 수업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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