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려고 그래? 이건 심판의 몸이 아닌데..."
2016 심판 활동을 위한 체력테스트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난 10월 말. 취재차 만난 한 은퇴 심판이 기자를 향해 던진 핀잔 한마디가 따끔하게 느껴졌다. 지난 5월 울산종합운동장에서 리텐션코스를 통과(▶관련기사 보기)한 뒤로 심판 활동을 이어가긴 했지만 말도 살 찐다는 가을의 섭리를 거스르지 못했다. 늘어난 술자리만큼 살도 늘었고, 줄어든 운동량만큼 체력은 떨어졌기 때문이다. 십 수년의 심판 생활을 마친 뒤 심판감독관으로도 활동 중인 그 분의 눈은 정확했다. 거울 앞에 서니 지난 겨울에 만났던 ‘불량 심판’이 다시 나타나 낮은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 최악의 날씨, 더 깊어진 한숨
지난달 29일 체력테스트를 위해 서울 양천구 목동종합운동장에 들어선 이 '불량 심판'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궂은 날씨 속 겨울비가 운동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시커먼 하늘은 준비 안 된 심판에겐 내년 활동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엄포 같았고, 하염없이 내리는 차디찬 겨울 비는 준비 안 된 기자의 마음 속에 내리는 비 같았다.
1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체력테스트는 심판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 날의 결과에 따라 이듬해의 활동 여부와 함께 승급 여부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체력테스트는 스프린트와 인터벌 테스트를 모두 통과해야 합격이다. 40m 달리기를 6번 반복 해야 하는 스프린트의 제한시간은 남녀 각각 6.4초, 6.8초다. 6번 중 한 번 실패하면 1차례의 추가 기회가 주어지지만 두 번째 시간 초과 땐 가차없이 탈락이다.
스프린트를 통과하면 지옥의 인터벌 테스트가 기다린다. 150m 달리기(남성 30초·여성 35초 이내)와 50m 걷기(남성 40초·여성 45초 이내)를 제한시간 내에 모두 통과해야만 합격이다. 1급과 2급 심판은 20회 (4,000m), 3급 심판은 14회(총 2,800m), 4급 심판은 10회(총 2,000m)를 모두 통과해야 합격이다. 꾸준한 체력관리는 기본, 테스트 당일의 컨디션까지도 그 날의 결과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서울기상청에 따르면 체력테스트 일정이 시작된 9시 기준 양천구 기온은 2.5도, 체감 기온은 1도였다. 비까지 계속 뿌려 여기 저기서 "최악의 날씨"라는 푸념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체력테스트 당일의 기상 조건이 탈락의 핑계가 될 순 없다. 축구 경기는 웬만한 비와 추위에서도 예정대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악조건 속 체력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악조건 속 경기에 나설 자격이 없단 의미이기도 하다.
● 부상자 속출…그리고 예견된 결과
2016년 자격 유지를 위한 살 떨리는 레이스가 시작됐다. 여자심판 11명이 전원 합격하며 기분 좋은 시작을 알렸지만 비교적 체력 관리가 잘 된 남자 1급·2급 심판 중 탈락자들이 발생하며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0년 경력의 1급 심판조차 "10년 새 가장 힘든 체력테스트였다"며 "마지막까지 근육이 풀리지 않아 매 구간 아슬아슬 했다" 고 말했다. 심지어 내년 프로 심판 입성을 조심스레 내다봤던 베테랑 1급 심판은 엄격한 잣대 속에 탈락해 울분을 삼켰다.
추운 날씨 탓인지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햄스트링 부상을 입은 심판들이 속출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심판들이 체력테스트를 통과했지만 대부분 힘겨워했다. 악에 받친 비명도 심심찮게 들렸다.
3급 심판인 기자는 3급ㆍ4급 심판들이 섞인 11조에 배정돼 오후 12시가 넘어서야 체력테스트에 임할 수 있었다. 3시간여의 대기 시간이 몹시 지루했지만 심판강사의 지도 아래 실시된 약 15분간의 준비 운동을 마치니 서서히 긴장감이 몰려왔다.
스프린트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고 인터벌 테스트 출발선 앞에 섰다. 400m 트랙을 총 7바퀴 돌아야 하는 레이스 중 세 바퀴를 무사통과 했지만 4바퀴째에서 이상 신호가 왔다. 원래 좋지 않았던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자 발이 무뎌졌고, 4바퀴가 완성된 8번째 구간에선 결국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아쉽지만 레이스를 접는 쪽을 택했다. 결과는 탈락. 2016년 자격 정지 심판이 됐다.
아쉬움은 컸지만 어느 정도 예견했던 탈락이었기에 이내 결과를 받아들였다. 최근 2~3주간 틈 나는 대로 운동을 했지만,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동안 주말에도 여유 없는 생활이 이어져 컨디션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체력테스트 당일 날씨가 쾌적했더라도 통과를 생각하긴 어려운 몸 상태였다. 자격 없는 심판의 당연한 탈락이었다.
● 그럼에도, 체력테스트장을 향한 이유
탈락을 예견했음에도 굳이 휴일 하루를 비워 체력테스트에 임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해보지도 않은 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현재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측정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여기에 하나 더. 단 하루라도 더 심판으로서 함께 호흡하고 싶었다. 심판 자격은 원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의 탈락은 2006년 심판 자격 취득 때부터 실시했던 총 5차례(리텐션코스 포함)의 도전 중 두 번째 탈락이다. 합격률은 기존 75%에서 60%로 떨어졌다. 보다 현실적인 수치는 최근 2년 내의 합격률이다. 총 세 차례의 도전 중 한 차례만 겨우 합격했다. 마라톤 대회에 꾸준히 참여하며 체력을 키워왔던 20대 초·중반 때의 성적표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쩌면 올해가 심판 활동의 마지막 해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슬픈 예감도 찾아왔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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