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뻑이란 고스톱에서 생긴 말로서, 자기가 ‘싼 것’을 자기가 먹는 것을 가리킨다. 즉, 깔려 있는 어떤 패를 먹으려고 손에서 패를 내놓고 더미에서 뒤집었을 때 다시 같은 패가 나와서 패 석 장이 모두 같은 달인 경우에, ‘뻑’ 또는 ‘쌌다’고 한다. 이 때 싸서 모아둔 패 석 장은 같은 종류의 마지막 한 장을 갖고 있거나 뒤집는 사람이 먹게 되는데, ‘뻑’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피를 한 장씩 더 받는다.
요즘 보통 ‘자뻑’은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을 슬쩍 조롱하는 느낌으로 묘사할 때 쓰는 경우가 많다. 이 때의 ‘뻑’은 ‘뻑(이) 간다’는 표현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게 맞아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나 무엇인가에 빨려 드는 상태를 일컬어서 ‘뻑(이) 간다’고 한다. 한참 전에는 ‘뿅 간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뿅’은 상당히 애교감이 깃든 표현이고 ‘뻑’은 그보다는 훨씬 더 드라이하고 리얼하다. 둘 사이의 강도 차이는, 예컨대 뿅망치로 맞았을 때와 퍽치기를 당했을 때의 차이와 비슷하다.
‘자뻑’이나 ‘뻑(이) 간다’는 표현은 일상 현대 한국어의 묘미를 잘 드러낸다. 그 묘미란, 원래 의태어 내지는 의성어 역할을 하던 부사 ‘뻑’에 조사를 붙여서 명사처럼 다루고 또 여기에 ‘간다’는 동사를 붙여 쓰는 데 있다. 그러니까, 보통의 현대 한국어 화자에게 ‘감’이나 ‘필’은 오는 것이고 ‘뻑’은 가는 것이다. 이 때 ‘간다’에는 아주 오래 전의 ‘홍콩 간다’에서의 그 ‘간다’는 느낌도 깃들어 있는 듯하다.
자기 도취, 혹은 자아 도취라고 옮겨지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나르키소스(Narcissus)로부터 생겨났다. 젊고 아름다운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의 반사된 모습인 것을 알아채고 나서는 자살을 했다.
도취(陶醉)란 단어는 중국 당 나라 시인 최서(崔曙)의 시에서 유래한다. ‘중양절에 망선대에 오르다’란 제목의 시 마지막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거칠게 옮기자면, “차라리 신선에게 도연명이 있는 곳을 묻고 싶다. 함께 즐겁게 실컷, 중양절 국화를 놓고 취할 수 있도록”이라고 노래한다. 여기서부터 ‘즐겁게 실컷 취한다’(陶醉)란 말이 만들어졌고, 점차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듯이 무엇인가에 홀딱 빠져 있다는 뜻으로 확장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대통령으로부터 여야 국회의원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자뻑’이 심하다는 것이다. 자뻑을 즐기는 정치인들은 국민이나 유권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내 눈에는 ‘비풍초’로 보이는 정치인들이 자기 거울의 ‘똥팔삼’에 도취되어 있다.
정치인들의 자뻑이 계속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한국 정치판 자체가 ‘낙장불입’이라는 나쁜 관행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한 번 뽑아서 정치판에 던져 놓으면 유권자들로서는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한국 정치판에서 투표라는 것은 상품으로 치자면, 반품, 교환, AS 등이 전혀 안 되는 아주 질 나쁜 상품인 것이다. 유권자들에게는 단지 사후에 욕하는 권리만이 주어져 있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유명한 글에서 ‘국민투표제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투표에 의해 정치인을 한 번 뽑으면 그것으로 그만일 뿐 그 다음에는 유권자들이 무시되는 바의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소위 국민투표제 민주주의와 한국 정치인들의 자뻑은 깊은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오늘날 정치학자들은 ‘국민투표제 민주주의’를 ‘수동성의 정치’ ‘괴리의 정치’ ‘극장형 관망의 정치’ ‘정치 없는 민주주의’ 등으로 규정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 전반에 대한 환멸이 커지기 때문에 결국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바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 의해서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인 사람들. 이 사람들은 지금 헬조선에서 ‘N포세대’라고 불리고 있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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