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선언한 현 정부와 여당은 기존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주장한다. “좌파가 준동하며 미래를 책임질 어린 학생들에게 부정적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다”(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역사는) 국가가 한 가지로 가르쳐야 국론 분열의 씨앗을 뿌리지 않을 수 있다”(황우여 교육부 장관)는 게 국정화의 논리다. 반대 여론에 귀를 막은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는 국정화를 기정사실로 굳히고, 표현과 출판의 자유라는 민주사회의 대원칙을 압도했다. 그러나 작용이 크면 반작용도 큰 법. 출판계가 응전에 나섰다.
단행본 출판사들을 중심으로 모인 한국출판인회의가 지난달 한국사 국정교과서 반대 성명을 낸 데 이어 몇몇 출판사들이 맞받아칠 준비에 들어갔다. 내년 창립 20주년을 맞는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가 그 중 하나다. ‘올바르지 않은 한국사’라는 문고본 시리즈로 국정화가 강조하는 ‘올바른’ 교과서에 대응할 예정이다. 1970년대 유신 이야기로 연말에 제1권을 내고,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제 2권 ‘사라진 독립운동가’ 등 10권 정도를 기획하고 있다.
‘접속 1990’의 저자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산하의 오역’을 연재해 역사 이야기꾼으로 잘 알려진 김형민 PD가 푸른역사에서 낼 신간도 국정화에 태클을 거는 즉각 대응이다. 국정화 파동이 터지기 전부터 한국역사연구회 학자들과 함께 작업해온 시대별 한국사 개론서의 두 번째 책인 근대사 편은 내년에 출간할 예정이다.
좌편향으로 지목돼 교육부에서 수정 지시를 받았던 금성사 검정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의 대표필자였던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국정화론을 정면 반박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왜 문제인가’를 집필 중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역사적 배경과 쟁점을 쉽게 풀어 씀으로써 역사 교육의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역사 전문 출판사 책과함께에서 12월 초 나올 이 책은 독자들이 출간 비용을 마련해주는 북펀딩 방식을 택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펀딩 중인데, 펀딩 마감을 하루 앞둔 30일 현재 239명이 참여해 783만원을 모았다. 북펀딩 페이지에 띄운 본문 맛보기 글에서 김 교수는 역사 해석은 하나일 수 없는데도, 국정 역사교과서는 역사 해석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썼다.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을 바로잡는 교과서가 되건 아니건 간에, ‘친일 독재 미화’교과서가 되건 아니건 간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근본적으로 나쁘다.” 이와 별도로 알라딘은 ‘국정 교과서 논란과 한국현대사 쟁점 읽기’에 관한 책을 따로 모아 판매하는 이벤트도 벌이고 있다.
휴머니스트 출판사가 2002년 선보인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화를 지지하는 극우세력으로부터 좌편향 역사 교육을 주도한다고 비난받는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쓴 책이다. 하지만 재미없는 암기과목 죽은 역사가 아니라, 재미있고 스스로 생각하며 토론하는 역사 교육을 제시했다는 평가와 함께 꾸준히 사랑받는 책이다. 황서현 휴머니스트 편집주간은 “검인정 체제이던 14년 전 일종의 대안교과서로 이 책을 낼 때만 해도 검인정 체제가 머잖아 자유발행제로 갈 거라고 예상했지, 거꾸로 국정화는 생각지 못했다”며 “지금이야말로 역사 교육과 역사 출판이 나아갈 방향을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화 반대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갇힌 역사에서 열린 역사로 나아가는 큰 방향을 기획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국사 중심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맥락의 역사, 유럽이나 중국이 주연이고 나머지는 조연인 세계사를 넘어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갈 때라는 것이다. 이 출판사가 내년 2월 선보일 동아시아사 책은 한중일 3국 중심이 아니라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동남아시아까지 포함하는 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번 국정화 논란으로 역사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 출판이 중흥의 계기를 맞았다는 아이러니한 기대도 없지 않다. 강단에 머물던 학자들이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역사책을 쓰려는 욕구를 자극할 거라는 전망도 있다. 역사학자들이 대중적인 저술을 쏟아낸 건 1990년대다. 2000년대 이후 대중 역사서는 전문 학자가 아닌 교양 저술가들이 나서서 베스트셀러를 내고 학자들은 연구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전문 학술서와 대중 교양서의 간격이 커졌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국정 역사 교과서가 부활하는 바람에 논문에 매달리던 학자들이 다시 대중 역사서를 쓸 이유가 생겼다. 덕분에 전문성을 갖춘 학자들이 쓰는 대중 역사서의 출판은 더 활발해질 거라는 전망이 많다. 이게 다 대통령 덕분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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