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에 시작된 미국에서의 적정기술 운동은 1976년 카터 정부의 국립적정기술센터(NCAT) 설립, 1981년 폴 폴락의 국제개발회사(IDE) 설립, 1991년 마틴 피셔와 닉 문의 어프로텍(현 킥스타트) 설립하는 등 정부 민간연구소 기업 비영리단체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기존의 적정기술 운동에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는 ‘주가드 이노베이션’(본보 11월 9일자 19면 참조) 개념과 사용자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는 디자인사고가 점진적으로 결합되었고, 활동도 대학과 학회로 확산되었다.
적정기술 단체에 투신하는 대학생들
미국 코넬대 대학원에서 공학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레지나 클레로우는 2001년 동료이자 멘토인 크리쉬나 아드레야와 함께 코넬대 비영리기구 인큐베이터의 도움으로 적정기술 관련 전국 네트워크인 변경없는공학자회(Engineers Without FrontiersㆍEWF)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EWF-USA는 현재 36개 대학에 지부를 두고 공학기술을 활용해 환경 및 지속가능성 이슈를 해결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유럽에서 시작된 국경없는공학자회(Engineers Without BordersㆍEWB)의 미국 지부도 같은 해 아마데이 교수에 의해 콜로라도에 설립되었다. 변경없는공학자회는 명칭 갈등 끝에 2004년에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공학자회(Engineers for a Sustainable WorldㆍESW)’로 변경하였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대학에 지부를 설립해 현재 미국의 웬만한 대학에는 EWB-USA 또는 ESW-USA 학생지부가 설립돼 있다.
노스웨스턴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유리 말리나는 미국에도 의료 서비스를 안전하고 저렴하게 만들거나, 교육의 질을 개선하거나, 재생에너지 기술을 개발하는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기 때문에 개발 활동을 하기 위해 아프리카나 인도까지 날아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그는 2009년 미국 도시경제 활성화를 위해 다학제적 디자인을 하는 스튜디오 네트워크 ‘디자인 포 아메리카(DFA)’를 설립했다. DFA는 “미국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사고 방식 및 기술을 보유한 창조적인 차세대 활동가”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DFA는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자전거로 15분 거리 안에서만 임무를 진행하는 슈퍼로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말리나는 첫 프로젝트로 시카고의 한 지역 병원과 협력해 바쁜 의사와 간호사가 일하는 도중에 손을 소독할 수 있는 롤온형 휴대용 손소독제를 디자인했고, 이를 제품화하는 기업 스와이프센스(Swipe Sense)를 2012년 설립했다.
적정기술 수업이 등장하다
미국 대학에서 적정기술 관련 교육이 활성화된 것은 에이미 스미스가 2002년에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 학부 과정에 ‘D-lab’ 교과목을 개설하면서부터다. 이 학과를 졸업한 스미스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보츠와나에서 4년간 봉사하면서 “문제 해결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가장 적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보츠와나에서 돌아와 같은 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한 스미스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제작 가능한 간단한 제분기를 개발, 2000년에 여학생으로는 최초로 레멜슨-MIT 상을 수상한다.
2002년 MIT 강사가 된 스미스는 ‘D-lab’이라는 교과목을 개설했다. 여기서 D는 “대화(Dialogue) 디자인(Design) 보급(Dissemination)을 통한 발전(Development)”을 의미한다. 이 과목은 방학 중 개발도상국가 현지를 방문한 후 학기 중에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디자인을 실시한다. 주요 디자인 제품으로는 2003년에 아이티에 보급한 사탕수수 숯, 2007년에 과테말라에 보급한 자전거를 활용한 드럼통 세탁기, 태양광 살균장치 등이 있다. 2011년에 필자가 D-lab을 방문하였을 때 건물 복도 벽에는 그 동안 D-lab에서 개발한 적정기술 제품 포스터 50여개가 게시되어 있었다. D-lab 과정은 처음에는 한 과목으로 시작돼 2015년에는 에너지, 공급채널, 디자인, 개발, 현지조사, 지구, 발견, 쓰레기, 학교 등 총 15개 과목으로 늘었다. 현재 D-lab은 학부 수업 이외에도 국제개발디자인서밋(IDDS) 개최, IDDS 출신 혁신가들의 네트워크인 국제개발혁신가네트워크(IDIN) 운영, 개발된 적정기술 제품의 상용화를 위한 스케일-업스(Scale-Ups) 펠로십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03년 스탠포드대에는 ‘누구나 구입가능한 제품 개발을 위한 기업가적 디자인’이라는 대학원 과목이 짐 파텔(경영학과)과 데이비드 비치(기계공학과) 교수에 의해서 개설되었다. D-lab과 마찬가지로 방학 동안 미얀마 등을 방문하고 현지적용 가능한 제품을 디자인해 창업한다. 2006년 시작한 태양광 전등 프로젝트팀은 2007년에 d.light라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였다. 설립 목적은 “전기가 안 들어오는 가정에 사는 사람들이 전기가 들어오는 가정에 사는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개발한 10달러짜리 태양광 전등은 2010년 어쇼든상(지속가능한 에너지 부문)을 수상하였다.
이 수업을 수강하던 제인 첸, 리누스 리앙, 나가난드 머티, 그리고 라훌 패니커는 네팔에서 조산아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이들은 기존의 전기 인큐베이터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긴 시제품을 제작한 다음, 테스트를 위해 네팔로 건너갔다. 이들은 네팔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미숙아 사망의 80%가 설비가 갖춰진 병원이 아니라, 전기 공급이 일정하지 않은 가정집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통찰 끝에 이들은 조그만 침낭처럼 생겨 엄마가 들고 다니기 쉽고 아이들과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휴대용 유아 워머를 디자인하고 임브레이스(Embrace)란 기업을 설립하였다. 워머 뒤쪽에는 밀랍과 유사한 상변화 물질을 담은 주머니가 있어 여섯 시간 동안 정상 체온을 유지시켜 준다. 이 워머는 사용하기 쉬울 뿐 아니라, 가열하는 데 휴대용 충전기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아용 워머의 가격이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인큐베이터의 2%도 안 된다는 점이다. 현재 임브레이스는 스탠포드대의 루실팩커드아동병원에서도 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는데, 선진국 중 유아사망률이 최고 수준인 미국 시장에 유아용 워머가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인 첸은 2011년 9월 ‘주가드 이노베이션’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나비 라드주와 가진 인터뷰에서 “기업가들은 종종 제품 또는 비즈니스 모델의 최초 구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고객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큰 가치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제품의 특성과 가격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우리에게 혁신이란, 결코 끝나지 않는 역동적인 과정이다”라고 말하였다.
적정기술 운동이 학술활동으로 변신
대학 내 EWB-USA와 ESW의 학생 지부 설립, 관련 교과목 개설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미국 공학계는 차츰 적정기술 운동을 학회 활동으로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전기전자공학회(IEEE)는 미국 서부 지역에서 2011년부터 매년 10월에 ‘국제 인도주의 기술 컨퍼런스(GHTC)’를 개최한다. 필자는 2013년 미국 새너제이에서 개최된 ‘제3회 ‘국제 인도주의 기술 컨퍼런스’에 참석해 온돌형 곡물 저장시설에 대해서 발표했다.
지난 10월 시애틀에서 개최된 ‘제5회 국제 인도주의 기술 컨퍼런스’에는 30개국에서 300여명의 적정기술 분야 전문가가 참여해 건강ㆍ의료기술ㆍ원격의료, 재난 경고 및 대응, 수자원, 교육 기술, 농업기술, 지속가능한 에너지 등 분야에서 발표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MIT와 스탠포드대 외의 여러 대학에서 적정기술 관련 프로그램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퍼듀대는 ‘지역사회 봉사를 위한 공학 프로젝트(EPICS)’를 진행하고 있었고, 시애틀에 있는 워싱톤대에는 ‘인간중심디자인 및 공학(HCDE)’ 학과가 개설돼 있었으며,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는 ‘인본주의 공학 및 사회적 기업가정신(HESE)’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미국기계공학회(ASME), EWB-USA, 전기전자공학회(IEEE)는 ‘변화를 위한 공학(E4C)’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공동으로 만들어 2011년 초부터 웹사이트(www.engineeringforchange.org)를 운영한다. E4C는 홈페이지에 “공동체의 삶의 질 개선에 헌신하는 엔지니어, 실행가 등을 위해 뉴스, 해결책 및 전문성 개발 정보를 제공하는 지식 공유 플랫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사명을 “국제 개발 종사자를 준비시키고, 해결책 개발 과정을 최적화하고, 공공 보건과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충분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8년 이후 몇몇 대학에서 주로 방학 등을 이용한 단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대학에서도 교과목, 학과 또는 프로그램 개설 등의 형태를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적정기술 관련 교육이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홍성욱ㆍ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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