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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표 민족문학 시효 다해... 창비 새 문학 노선 찾아야

입력
2015.11.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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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편집인 사퇴… 백낙청 체제 50년 만에 공식 막 내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창작과비평의 정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2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창비 문학상 시상식'에서 축사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창작과비평의 정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2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창비 문학상 시상식'에서 축사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창비 50년은 시련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의 퇴임을 준비하던 최근 반년 남짓은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위기와도 또 다른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상당부분 자업자득이며 새로운 각오로 제2의 50년을 출발하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기에 원망보다 감사가 앞섭니다.”

계간 창작과비평의 편집인 백낙청(77) 서울대 명예교수가 공식 사퇴를 밝힌 25일, 창비 문학상 시상식이 열린 프레스센터 20층은 과거 어느 때보다 붐볐다. 시상식에서 늘 개회인사를 맡았던 백씨는 이날 식의 마지막에 등장해 폐회인사 겸 퇴임사를 발표했다. 그는 “새 체제를 준비하는 TF팀이 구성됐다”며 “계간지 일에서 깨끗이 손을 뗄 것”이라고 밝혔다. 백씨와 창작과비평을 함께 만들어온 김윤수 발행인과 백영서 주간도 동반 퇴임했다. 이로써 창작과비평의 ‘백낙청 체제’는 50년 만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1966년 1월 당시 27세의 서울대 전임강사였던 백씨는 공평동 태을다방 옆 문우출판사 한 켠을 빌어 창작과비평 1호를 펴냈다. 명문가 자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남다른 배경 외에도 백씨는 자진 입대한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 받는 인물이었다. 유학이 합법적 군 기피수단이었던 시절에 입대를 위해 귀국한 그의 사연은 1960년 한 일간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청년의 고민은 창작과비평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30여쪽에 불과한 얇은 잡지에서 백씨는 “지배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순수문학을 정면 비판하며,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서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문학ㆍ지식인의 소명임을 선언했다. 문인이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 문학이 민중의 현실을 보듬는 손길로 호명된 순간이다.

창비가 ‘포스트 백낙청’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노선을 찾는 과제와 다르지 않다. 백씨가 주창한 민족문학 개념이 시효를 다한 상황에서 창비가 새로운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창비 편집장으로 들어와 연을 이어온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민족문학이란 단어는 사실상 폐기 상태”라며 “창비가 할 일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작가들을 발굴함으로써 창비만의 문학적 노선을 재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를 “리얼리즘 문학의 갱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자유주의로 폐허가 된 현실을 직시하고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시와 소설에 주목해야 한다”며 그는 “창비가 담론 생성에 치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작가 배출에 소홀했다. 다른 출판사에서 키운 작가를 데려와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2000년대 들어오며 창비가 고수해온 민중ㆍ민족문학 기조는 거의 무너졌다”며 “백 선생 사퇴를 계기로 창비 내부에 더 다양한 의견이 흘러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현실에 대한 관심, 도덕적 태도를 밑에 깔고 문학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시대가 변하더라도 창비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낙청 체제가 실질적으로 종식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전망도 많다. 우선 백씨가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주주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다가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을 맡게 될 차세대 인사의 상당수가 백씨와 사제관계 등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창비에서 백 선생의 위치는 절대적”이라며 “누가 (발행인, 주간이) 되든 수렴청정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는 백씨가 퇴임사에서 신경숙 표절에 대해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고 사퇴한다면 그 다음 사람 중 누가 그 말을 무시하고 비판적 입장을 세울 수 있겠느냐”며 “미안한 말이지만 지분을 모두 포기하고 편집위원으로 있는 딸(백영경 방송대 교수)까지 물러나는 식으로 완전히 정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탈 백낙청’은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TF팀의 일원으로 2016년 봄호를 준비하고 있는 한기욱 창비 부주간은 “신경숙 사태로 인해 창비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며 “독자들이 창비에 가지고 있는 기대를 통감하고 문학에 좀 더 집중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고 말했다. 신임 발행인과 주간, 부주간은 신년 1월에 발표된다.

앞서 문학동네는 강태형 대표와 1기 편집위원 전원이 물러났다. 문학과지성사도 내년 인적쇄신을 준비 중이다. 한국 문학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들이 떠나면서, 2015년은 현대문학이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페이지가 됐다. 새 종이에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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