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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왕 투탕카문, 파라오 전설의 얼굴이 되다

입력
2015.11.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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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제18왕조의 12대 파라오 투탕카문(Tutankhamun 투탕카멘)의 무덤이 1922년 11월 26일 열렸다. 도굴ㆍ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발굴된 사실상 첫 이집트 고대 왕가의 무덤이었다. 투탕카문의 황금 마스크(사진)를 비롯한 수천 점의 유물이 나왔다. 학계는 전설을 확인하느라 분주했고, 세상은 새로운 전설을 만드느라 분주해졌다.

알려진 바 투탕카문은 다신교의 이집트를 태양신 ‘아톤’을 숭배하는 유일신교의 나라로 개혁하려던 군주 아크나톤의 아들로 10살에 파라오가 돼 ‘소년 왕’으로도 불린다. 재위 기간 중 카르나크와 룩소르 등지에서 진행된 신전 작업은 그의 나이로 보건대 섭정에 의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무덤에 사냥ㆍ전쟁을 지휘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지만 학계는 미라 분석 결과 그가 오른쪽 다리 골 질환과 왼쪽 다리 선천성 내반족을 앓아 걷기도 힘들었고, 선천성 구개열도 있어 언어 장애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왕가의 오랜 전통인 근친혼과 무관하지 않은 장애였다. 투탕카문 역시 친 누나(안케센파이텐)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는 재위 9년째인 18세에 말라리아의 일종인 열대열원충에 감염돼 숨졌다.

하워드 카터(1874~1939). 1922년 오늘 투탕카문의 무덤을 열었다.
하워드 카터(1874~1939). 1922년 오늘 투탕카문의 무덤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가 고대 이집트의 ‘얼굴’이 된 것은 업적 덕이 아니라 무덤 덕이었다. 그의 무덤을 발견해서 처음 연 것은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1874~1939)였다. 카터는 1907년 한 영국 귀족(Lord Carnarvon)의 지원을 받아 발굴단을 이끌고 남부 룩소르(옛 지명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들어섰다. 오랫동안 아무 성과가 없었고,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발굴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실망한 귀족은 그에게 마지막 한 계절만 지원하겠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그게 1922년이었다.

구체적인 발견 과정은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그는 그 해 11월 4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고, 낭보를 듣고 달려온 귀족(과 그의 딸)과 함께 26일 문을 열었다. 뭐가 보이느냐는 귀족의 질문에 그 역시 아무 것도 안 보였지만 “Yes, Wonderful things!”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실이 열린 것은 이듬해 2월 16일이었고, 석관이 있던 묘실은 또 한참 뒤에 열렸다. 하지만 카터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64세이던 39년 3월 악성림프종으로 숨졌고, 호사가들은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을 만들었다.

아케나톤 시대의 수도 아마르나에서 1914년 발견된 네페르티티의 흉상. 네페르티티는 '미녀가 왔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케나톤 시대의 수도 아마르나에서 1914년 발견된 네페르티티의 흉상. 네페르티티는 '미녀가 왔다'는 뜻이라고 한다.

지난 9월 영국 고고학자 니콜라스 리브스가 투탕카문 묘실의 북쪽과 서쪽 벽 뒤에 2개의 비밀 문이 있으며 그 문들이 이집트 전설의 미녀이자 아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무덤으로 통하는 입구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리브스는 이집트 유물부와 함께 11월 말 본격적인 레이저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후속 보도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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