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임금 단종을 빼고 영월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주천면 어음정에서 남면 청령포까지 영월 땅을 지나는 ‘단종대왕 유배길’만도 43km에 이른다.
서쪽은 험준한 육육봉 암벽이 막고 있고, 동·남·북 3면은 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는 배가 아니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섬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곳을 골랐을까 싶을 정도로 최적의 유배지다. 노산군으로 폐위된 어린 임금의 마지막 남은 의욕마저 꺾어놓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역설적이게도 서강이 흘려놓은 아름다운 풍광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담백하다. 청령포를 둘러보는 걸음걸음도 단종이 느꼈을 설움과 비애에 빠져 들 수 밖에 없다.
청령포는 지금도 관광용 도선으로만 갈 수 있다. 내부는 아름드리 솔숲으로 가꿔져 고립감보다는 아늑함이 느껴진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정비한 산책길을 걸으면 짙은 솔 향기가 온몸에 배일 듯하다. 송림 한가운데자리는 밑동에서부터 두 갈래로 뻗은 크고 멋진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데, 관음송(觀音松)이라 이름 붙였다. 단종의 슬픔을 보고들은 나무라니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측 산책로로 몇 발짝 들어가면 머리 돌이 훼손된 금표(禁標)를 만난다. 임금의 유배지인 이곳에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하는 표식인데, 내용인 즉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까지 출입금지다(가로세로 각각 90m, 150m쯤 된다). 영조 때 세운 비석이니 단종 사후의 일이지만, 일반인 접근금지 영역 바깥은 반대로 단종도 벗어날 수 없었던 범위라 볼 수 있겠다. 단종이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는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그가 처한 상황처럼 지형 자체가 고립무원임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임금이 거처했던 어소(御所)는 청령포 남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 모습은 아니고 2000년에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한 것이다. 왕의 처소라 하기에는 소박하지만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단아한 건물은 유배시설의 옹색함은 다소 벗은 듯하다.
청령포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강이 빚어놓은 또 하나의 걸작을 만난다. 바로 선암리 한반도지형이다. 정확히는 평창강과 주천강이 만나 서강을 이루는 바로 윗부분이다. 전국에 한반도 지형이 여럿 있지만 형태가 가장 비슷하고 ‘원조’임을 자부하는 곳이다. 영월군은 2009년 서면이었던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해 아예 한반도면으로 못박았다.
한반도지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는 주차장에서 약 1km를 걸어야 한다. 시작 부분 짧은 오르막만 지나면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산책로 곳곳에 석회암 지형의 특성을 설명하는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지만 눈썰미를 발휘하지 않으면 관찰이 쉽지 않다(김삿갓면 고씨동굴이 영월의 대표적 석회암 동굴이다).
전망대에는 안전대를 설치하고 주변에 무궁화를 심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지만 이런 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증샷’, 전망시설 왼편 끝자락에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한발 내려서서 앉아야 한반도지형을 가리지 않고 온전한 배경으로 찍힌다. 이왕이면 짙푸른 강물에 뗏목이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이면 더욱 좋겠다. 선암마을에서 출발한 체험 뗏목이 동해와 서해를 오가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영월=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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