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77)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이 25일 오후 6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창비 통합시상식에서 폐회인사와 함께 퇴임사를 발표했다. 계간지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계획을 명확히 하면서 소설가 신경숙씨 표절 논란 당시 판단을 유보했던 것에 대해 “한국문학의 품위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고 언급했다.
백씨는 “창간호의 편집인이었고 그 후 더러 끊김이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편집인 자리를 지켜온 저는 올해를 넘기지 않고 물러나기로 두어 해 전에 이미 결심”했다며 “편집인을 그만둔다 해서 출판사 창비를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계간 ‘창작과비평’에 한해서는 창간편집인 없이 해나가는 경험이 장기적인 존속의 관건이라 믿기에 계간지 일에서만은 깨끗이 손을 뗄 작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신씨 논란 당시 창비가 보인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백씨는 “창비의 대응에 대해 자성하고 자탄할 점이 많다. 특히 독자와의 소통능력이나 평소 문학동료들과의 유대 형성, 사내 시스템의 작동 등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어떤 ‘기본’을 어렵사리 지켜낸 것만은 자부할 수 있다”며 “한 작가의 과오에 대한 지나치고 일방적인 단죄에 합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패한 공범자로 비난 받는 분위기에서, 그 어떤 정무적 판단보다 진실과 사실관계를 존중코자 한 것이 창비의 입장이요 고집이었다. 결과적으로 더 큰 뭇매를 자초하기도 했습니다만, 한 소설가의 인격과 문학적 성과에 대한 옹호를 넘어 한국문학의 품위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다”고 밝혔다.
이날 백 편집인과 함께 김윤수 발행인, 백영서 주간도 동반 퇴임했다. 세 사람은 올 연말까지 업무를 수행하고 내년부터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이 ‘창작과비평’을 꾸려 나간다.
<백낙청 퇴임사 전문> 백낙청>
연말의 통합시상식은 저희 창비의 최대 연례행사입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는 만해문학상 수상자를 내지 못했고 장편소설상도 내년의 창간 50주년 기념 특별공모를 앞두고 모집을 생략했습니다. 대신에 신인문학상 당선작이 시, 소설, 평론 분야에 고루 나왔고 제5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시상도 이 자리에서 했습니다. 수상하신 김지윤, 김수, 김요섭, 정현님 네 분께 축하를 드립니다. 신동엽문학상 수상자 박소란 시인과 김금희 소설가에게도 다정한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기쁘고 흐뭇한 것은 저도 참여한 백석문학상 심사에서 백무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를 수상작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백무산 시인은 일찍이 만해문학상을 받고 이번에 백석상도 받는 파격이라면 파격을 선보였습니다만, 그 정도의 파격은 감당하고도 남을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다고 확신합니다. 축하합니다.
수상작들을 골라주신 심사위원들, 축사를 해주신 염무웅 선생, 그리고 행사준비로 수고한 실무진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잔치를 잔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손님들의 정성과 사랑입니다. 바쁜 시간을 내셔서 훈훈하고 빛나는 자리를 만들어주신 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시상식은 저 개인에게 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내년 초에 계간 ‘창작과비평’이 창간 50주년을 맞습니다. 창간호가 출간된 것은 1966년 1월인데, 잡지 등록은 1965년 12월 10일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내달이면 50년이 꽉 차는 것입니다. 창간호의 편집인이었고 그 후 더러 끊김이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편집인 자리를 지켜온 저는 올해를 넘기지 않고 물러나기로 두어 해 전에 이미 결심했고 주위 몇분에게 알리기도 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창비 확대편집회의 석상에서 공지되었으며 올해 초 편집위원-편집국간부 합동연수회에서 재확인했고 5월 초에는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책다방’을 통해 공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50주년의 새 체제를 준비하는 특별작업반(TF)이 구성되었고 계간지의 후속체제와 이후 여러 계획에 대해 회사 차원의 준비와 결정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새해 초에 신임 발행인, 주간, 부주간 들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발표할 것으로 압니다.
편집인을 그만둔다 해서 제가 창비를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계간 ‘창작과비평’에 한해서는 창간편집인이 없이 해나가는 경험이 장기적인 존속의 관건이라 믿기에 저는 계간지 일에서만은 깨끗이 손을 뗄 작정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제가 창비 편집인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리는 마지막 통합시상식이 되었습니다. 자연히 감회가 남다르고, 무엇보다 그동안 도움을 주신 창비 안팎의 수많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러 이름을 거명하며 감사드릴 기회가 언제 따로 있으리라 믿고, 오늘은 저와 함께 물러나는 두 분―오랜 동지이자 창비 복간 이래의 발행인으로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공덕으로 이끌어주신 김윤수 선생과 지난 10년간 주간직을 맡아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저를 도와준 백영서 교수―에게만 고마움을 따로 전합니다.
창비 50년은 시련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의 퇴임을 준비하던 최근 반년 남짓은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위기와도 또 다른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상당부분 자업자득이며 새로운 각오로 제2의 50년을 출발하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기에 원망보다 감사가 앞섭니다. 그렇다 해도 오늘 수상하신 여러분의 명예를 위하여, 특히 창비를 통해 문단에 첫발을 들여놓는 세분 신인을 위해, 창비는 어쨌든 부끄러움보다 긍지를 느낄 일이 더 많은 동네임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온갖 역경을 딛고, 지금도 결코 순탄치 않은 환경에서, 이만큼의 연륜을 쌓고 이만큼의 명성을 얻으며 이만큼의 물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실력에 따르는 책무를 여축없이 완수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책임의 엄숙함을 아예 외면한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최근의 표절시비와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창비의 대응에 대해 자성하고 자탄할 점이 많습니다. 특히 독자와의 소통능력이나 평소 문학동료들과의 유대 형성, 사내 씨스템의 작동 등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어떤 ‘기본’을 어렵사리 지켜낸 것만은 자부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기본’을 고수하는 그 자세가 많은 비판자들의 맞춤한 표적이었고 창비를 염려하는 분들이 특히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기신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한 작가의 과오에 대한 지나치고 일방적인 단죄에 합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패한 공범자로 비난받는 분위기에서, 그 어떤 정무적 판단보다 진실과 사실관계를 존중코자 한 것이 창비의 입장이요 고집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큰 뭇매를 자초하기도 했습니다만, 한 소설가의 인격과 문학적 성과에 대한 옹호를 넘어 한국문학의 품위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창비의 다음 50년을 이어갈 후진들에게 넘겨줄 자랑스러운 유산의 일부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물론 ‘기본’을 지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표절문제뿐 아니라 이번에 제기된 여러 과제를 두고 이제부터 한층 다양한 관점에서, 그러나 상호존중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공유하면서, 본격적인 토의가 벌어져야겠습니다.
오늘은 창비의 잔칫날인 만큼 창비의 자랑거리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렵니다. 소수의 동지들이 모여서 운영하던 옛날과 달리 편집진의 규모가 커지고 구성이 다양해지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함께 공부하고 성찰하는 집단이 되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세교연구소를 창립하고 세교포럼을 100회 넘게 진행함은 물론, 계간지의 편집회의 자체가 토론과 상호 비판의 장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위기를 맞았을 때의 결속력도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최근에는 대중과 한층 가까이하는 교육사업을 구상하여 사단법인 창비학당을 지난달에 설립했고 내년 초 개강을 앞두고 있습니다. 창비 바깥에 계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임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만, 미흡하게나마 우리 사회에 흔치 않은 지적 협동체를 구축해왔고 이 혼탁한 시대에 없어져서는 안 될 성찰의 한 거점으로 커왔습니다. 이 또한 제가 후진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유산이며, 앞으로 더욱더 분발하여 한결같되 날로 새롭고 날로 새롭되 한결같은 창비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2015년 11월 25일 백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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