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취해서 밤늦게 귀가했다. 떠오르는 게 있어 한글 창을 열고 원고를 썼다. 바로 이 코너, ‘길 위의 이야기’ 원고였다. 취했기에 심신이 더 명징해질 때가 있는데, 딱 그 순간이라 여겼다. 일필휘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맺힘 없이 원고가 마무리됐다. 늘 저장해두는 폴더에 담고는 잠이 들었다. 여섯 시간 정도 잤을까. 가슴에 원인 모를 통증이 만져져 깼다.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최근 며칠 사이의 일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바로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폴더에 원고가 없었다. 늘 저장하는 패턴에 맞춰 새로 정한 파일명은 있었으나 열어보니 전혀 엉뚱한, 오래 전 묵혀뒀던 원고였다. 아무리 뒤져도 지난밤의 원고는 없었다. 뭘 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문장 몇 개가 아련히 상기됐으나 전체 맥락은 오리무중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하지도 않았었다. 벌써 치매가 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가슴 통증이 다시 강하게 사무쳤다. 막막하고 어이없고 고통스러웠으나 마음 한 켠에 이상한 해갈이 느껴졌다. 뭔가를 강렬히 잊고 싶어 하거나, 다시 돌이켜 절절하게 되찾고 싶어 하는 열망이 모종의 콤마 상태로 내 안에서 부딪친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돌이킬 수 없는 그대로 다시금 나를 나로 존재하게끔 만드는 자각증세. 그래서 지금, 그 잃어버림과 가슴 아픔에 대해 쓰고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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