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남부군 문화지도원으로 활동했던 최순희씨가 별세했다. 91세. 고인은 24일 빈소였던 경기 고양시 일산복음병원을 떠나 고인의 뜻에 따라 한 줌의 재가 돼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최씨는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던 이태의 자전적 소설 ‘남부군’ 속 최문희의 실제 모델이다. 동족 간의 전쟁과 남북 분단의 슬픔을 노래한 ‘지리산 곡(哭)’을 작사ㆍ작곡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24년 평양 출신인 고인은 유복한 인텔리 집안에서 자라 일본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해방 후 평양국립예술극장에서 공훈배우로 ‘카르멘’ ‘바보온달’ ‘춘향전’ 등 오페라 주연을 맡았다. ‘춘향전’에 출연할 땐 무용가 최승희에게 무용 지도를 받기도 했다.
최씨가 보낸 질곡의 세월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난 뒤 남로당이 파견한 광주문화예술총연맹 감독으로 전주까지 내려오다 인민군 후퇴 때 북으로 이동하던 중 완주군당에 소속돼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건너 가 ‘빨치산’으로 남부군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가리키는 말로 남부군은 남한 빨치산의 총책임자였던 이현상이 이끌던 부대를 말한다.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 외세에 밀려 좌우 이념으로 갈리고 동족끼리 살육을 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을 상징하기도 한다.
최씨는 지리산에 고립해 있던 남부군 제81사단 문화지도원으로 활동하며 군인들에게 노래와 춤, 연극으로 위로했다. 소설 ‘남부군’에는 남녀 대원들이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주위를 돌며 러시아식 포크 댄스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이 축제를 주도한 것이 최씨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대성골을 공격한 국군 토벌대에 밀려 남부군 문화대원 15명 중 11명이 사망했고 동상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원대성 인근에 숨어 있던 최씨 등 4명은 생포됐다. 체포된 뒤 최씨는 자신의 뜻과 달리 자수한 것으로 포장돼 지리산 빨치산의 자수를 권유하는 유인물에 이용되기도 했다.
최씨가 부른 ‘지리산 곡’은 당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위로하는 노래다. ‘철쭉이 피고 지던 반야봉 기슭엔’ ‘잊었느냐 피의 노래 통곡하던 물소리를’ 같은 구절은 두 눈 앞에서 피 흘리고 죽어간 영혼들 위에 흘린 눈물 자국과도 같다. 최씨는 9년 전 부산일보와 인터뷰에서 눈밭 위 붉은 핏빛이 철쭉처럼 붉어 이 같은 가사를 썼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에 따르면 고인은 관절염이 심했던 2003, 2004년을 제외하고 40년 이상 매년 9월 9일이면 지리산을 찾아 위령제를 지냈다. 그는 또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 때 전남 순천의 송광사 말사인 불일암에 친정 가듯 매달 한 차례씩 찾고 있다”며 “다행히 그 곳에서 평온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리산에서 체포된 뒤 다시는 지리산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가 위령제를 지내게 된 것도 당시 불일암에 기거하던 법정스님의 조언을 듣고 난 뒤부터였다고 한다.
최씨의 산행을 도왔던 피아골 대피소 소장 함태식씨는 저서 ‘그 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에서 고인의 위령제를 본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노고단에 올라와서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온 산에 대고 절을 했다.(…)그녀는 노고단 정상에 뜨거운 커피를 뿌렸다. 인텔리 빨치산들이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죽어가면서도 커피 한 잔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혼이라도 있는지 노고단의 붉은 땅에 뿌려진 커피가 금세 땅 밑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최씨가 ‘지리산 곡’을 녹음한 이유 중 하나는 북에 남겨두고 내려온 아들에게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중반 남북 왕래가 잦아지면서 스님들이 간혹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자 불일암 스님들에게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치고 노래해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했던 것이다. 최씨는 이 노래를 녹음한 게 1993년 전후라고 기억했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홀로 살았던 고인은 이 인터뷰를 제외하곤 언론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북한에 사는 아들의 생사도 끝내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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