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방수사국(FBI) 과학범죄수사연구소(약칭 FBI Lab)가 1932년 오늘(11월 24일) 설립됐다.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 시리즈에서 FBI요원 레이첼 월링이 이런저런 일로 문책 당해 좌천된 행동과학실(behavioral analysis unit)이 FBI 랩의 한 부서다.
워싱턴D.C에 처음 문을 열 당시 랩은 방 하나에 상근 직원도 달랑 한 명(찰스 어펠 Charles Appel 요원)이었고, 장비도 임대한 현미경과 ‘헬릭소미터(helixometer)’라는 탄도검사기기가 전부였다고 한다. 빈약한 예산ㆍ장비 지원은, 초기 FBI 랩이 과학수사를 위한 기구라기보다는 당시 국장 에드거 후버가 FBI의 첨단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설치한 선전 기구였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복사기와 거짓말탐지기를 들여놓은 건 1938년이었다.
현재 FBI 랩은 세계 최고의 과학수사연구소 가운데 하나다. 과학을 전공한 특수 연구요원 500여 명이 최첨단 장비와 조사 기법으로 연간 걸러내는 증거 자료만 약 25만~30만 건.(초기 약 10년 간은 한 해에 200건을 처리했다.) 범죄소설이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일반인에게 각인된 FBI 랩의 권능은 실제보다 더 대단할지 모른다.
오늘의 FBI 랩이 있게 한 데는 1990년대 말 폭로된 ‘흑역사’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듀크대 화학 박사 출신의 프레드릭 화이트허스트(Frederic Whitehurst)는 1982년 FBI 랩 요원으로 발탁돼 86년부터 13년간 연구감독관으로 일했다. 퇴직 직전인 97년 그는 랩 요원들이 알려진 것처럼 유능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요원들 다수가 법의학자라기보다는 FBI 요원으로서 스스로를 인식, 기소 검찰의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유죄 입증을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바꿔치기하고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이고 그 탓에 뒤집힌 판결이 약 1만 건에 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폭로는 FBI는 물론이고 미국 범죄수사 당국 전체를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다. 진위를 바로잡기 위한 재수사ㆍ재판결의 진통이 온갖 소송과 더불어 10년 넘게 이어졌다. 동시에 그 덕에 신뢰 장치를 비롯한 전면적인 제도 개혁과 우수 인력ㆍ장비 확보를 위한 예산 증액이 가능해졌다.
일제 치안국 산하 조직으로 출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1955년 내무부 산하 ‘연구소’로, 2010년 행정자치부 소속 ‘연구원’으로 거듭났다. 한때 경찰청 소속이다가 독립한 것 역시 증거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실체를 세상에 알린 당시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고려대 법의학교실) 박사의 예도 있지만, 국과수 필적감정 오류(2013년 시정)로 24년간 유서 대필 누명을 쓴 강기훈씨의 예도 있었다. 강씨는 이달 초 국가와 당시 수사검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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