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왜 도로에서 타는 거야, 안 그래도 좁은데…”
10월 말 오른 서울 남산 전망대. 기어코 한 소리 들었다. 난간에 자전거를 기대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 어르신이 동행에게 장광설을 펼치셨다. 출근 때마다 차도(이하 도로)에서 자전거를 만나는데 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이야기.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씀인지 뻔했다.
싸우기 싫어 삼켰지만 할 말은 있었다. 법이 도로로 다니게 정한 만큼 자전거가 자동차와 함께 달려도 자동차 운전자가 선의를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다. 운동용품이니 도로에서 타지 말라는 말씀 역시 왕복 20~30㎞ 정도는 자전거로 오가는 나로선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물며 온갖 짐을 싣고 달리는 생활인들에겐 어떻게 들릴까? 백 번 양보해서 즐기려고 자전거를 타는 경우라도 자동차 드라이브와 자전거 투어의 차이를 나는 모르겠다. 자전거 역시 같은 처지의 도로 이용자일 뿐이니 뭔가 불편하다면 도로를 관리할 책임과 능력이 있는 관계기관에 해결책을 따질 일이다.
어르신뿐이랴. 많은 자동차 운전자가 자전거의 도로 주행을 싫어한다. 온라인 공간은 익명에 기댄 악성댓글로 어지럽다. “자전거 자동차 도로에서 타지 마라, 보이면 밀어버릴 테다” 따위의 협박은 우스울 정도다.
최근엔 ‘자라니’라는 잔인한 표현까지 생겼다. 차선을 넘나들거나 거꾸로 달리는 자전거가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고라니와 닮았다고 손가락질하는 말이다. 몰상식한 일부 자전거 운전자가 일으킨 문제이지만 사람을 로드킬 당하는 짐승에 비유하다니 가슴이 서늘하다. 김여사와 김치남 등 다른 차별적 표현이 그렇듯 자라니 역시 자전거 운전자를 싸잡아 욕할 때도 심심찮게 쓰인다. 이유야 어쨌든 자전거는 도로에서 보기 싫다는 식이다.
●탈 곳이 없다
사실 자전거 운전자에게 도로 주행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일이다. 트럭이 일으키는 바람부터 돌 부스러기까지 자동차는 가볍게 무시할 충격도 자전거에겐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도 경계석에 닿을락 말락 페달을 밟아도 경적을 울리고 사라지는 위협운전자도 있다.
그러나 자전거도로가 부족한 탓에 하릴없이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가 많다. 해마다 자전거도로가 늘고 있지만 그것도 도로가 널찍한 지역 사정이다. 서울 도심에선 분리대나 경계석으로 보호받는 ‘자전거 전용도로’는커녕 ‘자전거-보행자 겸용 도로’조차 드물다. 시내 주행환경은 지옥이 따로 없다.
●있는 자전거도로도 엉망
이름만 자전거도로인 곳도 많다. 자전거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거나 동선을 엉터리로 설계한 길이다. 생색 내려고 만든 자전거도로는 생명까지 위협한다(관련기사: http://goo.gl/holtTa). 경계석이 없어 자동차 주차장이나 갓길로 변한 곳도 많다.
보행자가 자전거를 밀어내기도 한다. 울퉁불퉁한 인도보다 판판한 자전거도로가 걷기 편한 탓이다. 자전거-보행자 겸용도로 옆으로 나란히 뻗은 인도가 넓어도 자전거도로를 걷는 사람이 많다. 행인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노약자는 체력이 약해서 조금만 걸어도 발이 끌리는데 그럴 땐 인도보다 자전거도로가 편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성의 경우 구두 굽이 보도블록 경계에 걸리지 않아서 자전거도로를 좋아한다는 답변도 있었다.
같은 까닭에 휠체어 이용자 역시 넓은 보도보다 자전거-보행자 겸용도로를 선호한다. 거리에 노인과 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고령화가 더 진행되면 자전거로 겸용도로를 달리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배려하며 함께 달려요
결국 앞으로도 오랜 시간 자전거와 자동차는 함께 달려야 한다. 자전거 인구는 날마다 증가하는데 비교적 재정 형편이 나은 서울마저 예산이 부족해 시설투자가 부진한 상황. 단기간에 자전거도로가 크게 늘기는 어렵고 미래에도 통행로마다 자전거도로가 깔릴 가능성은 낮다. 행복한 동거를 위해선 독일처럼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간격을 법으로 정하는 등(http://goo.gl/f3pQzs) 제도 정비가 급하지만 행정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사정을 듣고서도 “그러니까 왜 자전거로 이동해야 하는데?”라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다. 모두가 자전거로 도로를 달려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화창한 주말 도심 가득한 자동차 행렬에 피로를 느낀 적이 있다면, 그런 상황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잠시라도 들었다면, 다른 방법을 선택한 사람에게 조금만 공간을 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김민호기자 kimon8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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