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현지 경찰을 사주해 한국인 사업가로부터 돈을 뜯어낸 인질강도 피의자가 국내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해외로 달아났다. 경찰이 안일하게 대응하다 중요 범죄 피의자의 해외 도주를 방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필리핀에서 피해자 박모(42)씨 등 2명을 협박ㆍ감금해 금품을 갈취한 혐의(인질강도)를 받고 있는 석모(32)씨를 기소중지 처분했다고 19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석씨는 지난해 1월 공사업자 박씨 등과 필리핀 막탄섬에서 유흥주점을 신축하는 공사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석씨 측이 착수금과 공사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갈등이 생겼다. 지난해 2월 박씨 일행은 석씨와 만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총을 발사하며 위협하는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괴한들에게 끌려간 곳은 섬 안의 한 경찰서였다. 현지 경찰 간부와 함께 나타난 석씨는 “공사가 지연돼 피해를 봤다”며 도리어 돈을 요구했다. 총기 보유와 자신을 협박한 혐의를 뒤집어 씌울 것이라는 협박을 당한 박씨 등은 겁을 먹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씨가 챙겨온 노트북으로 요구액 일부를 인터넷뱅킹을 통해 송금했다. 하지만 나머지 돈을 구할 수 없어 11일 동안 갇혔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난 이들은 현지 한인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도망쳤다.
피해자들은 지난해 5월 우리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가족을 통해 경찰로부터 출석 요구를 종용 받던 석씨는 8개월 만인 올해 3월 21일 귀국해 조사를 받았다. 조사결과 석씨의 혐의가 짙어지자 경찰은 조사 이틀 후인 23일 검찰에 석씨의 출국금지를 요청하고 피해자들과 대질심문을 벌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식사를 하고 오겠다며 경찰서를 나선 석씨는 그 길로 필리핀으로 달아나버렸다. 통상 출국금지 처분이 떨어지기까지 2, 3일이 걸리는 점을 노린 것이다. 뒤늦게 석씨의 도주를 알아챈 경찰은 그를 기소중지 처분하고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외교부와 협조해 석씨의 여권도 무효화했다.
피해자들은 경찰의 허술한 관리로 석씨가 국외로 도망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박씨는 “첫 조사 후 혐의가 어느 정도 드러났을 때 신속하게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피의자의 행방도 알 수 없는데 때늦은 수배조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박씨와 함께 감금됐던 심모(41)씨는 “당시 사건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당뇨까지 생겼다”며 “해외에서 국민들이 사고를 당해도 이처럼 보호 받지 못하면 어떻게 맘 편히 해외에 나가겠냐”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사를 받기 위해 자진 귀국한 피의자에게서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해야 했고 금전 문제가 걸려 있어 양측 모두를 수사할 필요성이 컸다”며 “석씨의 혐의가 피해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 일반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지만 긴급 출국금지 조치가 아니어서 시일이 걸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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