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오후였다. 집에서 혼자 컴퓨터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살인을 하고 나서 토막 낸 시체로 미술작품을 흉내 내는 연쇄살인범 이야기였다. 좋아하는 배우가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 역할을 맡았다. 별로 스릴 넘치지는 않았다.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도 하품이 나왔다. 건성건성 화면을 훑는 중에 갑자기 방에 파리가 나타났다. 어깨에 앉았다가 귓가를 희롱하다가 목덜미를 간질이곤 했다. 파리채를 찾기도 귀찮아 몸을 움찔하거나 팔을 휘젓는 것으로 대충 대응했다. 시선은 여전히 영화에 꽂아둔 상태였다. 한참을 귀찮게 하던 파리가 문득 기척이 없었다. 그 순간, 범인이 시체를 도살하는 은신처 장면에서 파리가 등장했다. 방 안을 떠돌던 파리와 크기가 비슷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방안을 둘러봤다. 파리는 보이지 않았다. 화면 속의 파리는 여전히 시체로 가공한 ‘작품’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범인은 파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내가 영화 속에 들어온 건지 영화가 내 안으로 들어와 버린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형사가 들이 닥쳤다. 마지막 격투 장면이 끝날 때까지 파리는 영화 속에도 방 안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자각은 혼돈과 착종을 밑그림으로 명징해진다,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어디서 봤었을까. 혹시, 내가 언젠가 썼던 문장일까. 날은 여전히 흐렸다. 세상 자체가 어두운 극장 같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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