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다. 패션의 이미지와 메시지는 이를 전달하는 패션모델의 이미지에 지배된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궁정에서 시작된 유럽의 패션산업은 이제 전 세계를 무대로 하지만, 여전히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심에는 백인 중심의 미적 기준이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모델로 서는 패션쇼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1868년 문화예술의 도시 파리에는 당시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모여 파리의상조합이라는 이익집단을 설립한다. 이들은 상류층 고객을 위해 살아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옷을 입혀서 선보였고 나아가 1910년경 최초의 모델 쇼를 개최한다. 이때부터 모델을 모집하기 위해 사진사와 패션 하우스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델을 공모했다. ‘안개 같은 금발과 유리 같이 반짝이는 눈, 둥근 팔과 어깨, 포동포동할 것’과 같은 공고문이 붙었다. 1910년대 패션모델의 미덕은 온화함이었다.
20년대 코코 샤넬의 등장과 더불어 패션모델의 기준이 바뀐다. 대담하고 강한 의지력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한 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고, 힙을 앞으로 기울이고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다른 손은 자유롭게 몸짓을 전달하는 ‘코코 포즈’를 개발해 퍼뜨렸다. 50년대는 패션모델의 전문화 시대다. 우아함과 정적인 아름다움 대신 개성이란 가치가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된다. 패션의 발랄한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디자이너 지방시는 체구가 작은 오드리 헵번 같은 말괄량이 타입의 모델을 선호했고 발렌시아가는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모델을 썼으며, 피에르 가르댕은 동양적인 여성미를 드러내기 위해 히로코 마츠모토란 일본계 모델을 기용했다.
1970년대 패션계에는 큰 변혁이 일어난다. 백인 중심의 미의식이 지배적이던 기존의 틀을 깨고 이국적인 미를 가진 모델들이 속속 등장했다. 올해 61세가 된 소말리아 태생의 슈퍼모델 이만이 주목을 받았다. 1974년에는 베벌리 존슨이 미국 보그지 최초의 흑인 모델이 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요즘 영국의 한 모델 에이전시 사이트를 자주 들른다. 프로필에 나온 모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설렌다. 바로 2014년 5월 캐나다 출생의 예술사 전공 대학원생 나피사 캡타운와라가 설립한 로드(Lorde)란 모델 캐스팅 에이전시다. 이곳에 가면 다양한 인종의 패션모델이 프로필에 올라와있다. 머리를 길게 땋은 흑인모델에서 광대뼈가 튀어나왔지만 깊은 눈매를 가진 중남미모델도 보인다. 놀라운 건 60여명의 모델 중 백인은 한 명도 없다는 것. 신생 모델 에이전시지만 결과도 좋다. I-D 같은 세계 유명한 잡지들과 활발하게 작업 중이니 말이다. 물론 현재 패션쇼에 오르는 모델의 98%가 백인이다. 유색모델은 작은 틈새를 메울 뿐이지만 최근 패션계에 조금씩 불고 있는 다양성의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패션은 항상 시대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런웨이 공간도 대화의 장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가치관이 옷을 통해 번역되는 과정들을 확인한다. 나는 1999년 봄/여름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쇼를 잊을 수가 없다.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한 여성 육상선수 에이미 멀린스가 모델로 나왔다. 그녀는 종아리뼈가 없이 태어나 한 살 때 두 다리를 절단했다. 디자이너는 그녀를 위해 멋진 의족을 만들어주었고, 그녀는 의족과 함께 당차게 걸었다. 런웨이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특정한 신체와 미의식의 기준’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우리는 대화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 개념을 오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소통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주장과 믿음을 효과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을 대화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지배문화는 인간과 세계를 독백에 가까운 관점으로 읽는다. 또한 이런 관점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패션은 늘 새로운 목소리와 다원적 가치를 향해 걸어왔다. 대화(Dialogue)란 단어의 어근인 ‘Dia’에는 ‘침투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만 각자가 완전한 가치를 가진, 각자 자신의 세계를 가진 다수의 목소리와 의식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서로에게 침투해가는 것이다. 패션이, 대화를 통한 혁명이어야 하는 이유다.
김홍기ㆍ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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