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다)'.
과거 유럽 귀족층에서 은식기를 사용하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대신 유모가 젖을 은수저로 먹이던 풍습을 빗댄 말이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2030 청춘들이 부모의 연소득과 가정환경 등 출신 배경을 '수저'로 빗대 표현하는 '수저계급론'이 화제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까지 등급이 나뉘는 수저계급론은 인터넷에서 놀이처럼 여겨지며 대단한 유행어가 됐다.
하지만 웃어넘기기엔 씁쓸한 면이 있다. 여기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감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신건영(24)씨는 "수저계급론이 스스로를 열패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면서 노력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했다.
▲ 상속된 부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발표된 부모의 재산이 자식의 경제적 지위까지 결정한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도 '수저계급론'에 설득력을 보탠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17일 낙성대경제연구소 홈페이지(<a href="http://naksung.re.kr">naksung.re.kr</a>)에 공개한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선 아직 민간이 축적한 부(富)에서 상속·증여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국들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저성장·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의 노력으로 번 소득보다 상속받은 자산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됐다.
김 교수는 불평등 문제를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제안한 방법을 이용해 한국인의 자산에서 상속 자산의 기여도가 얼마나 높아지고 있는지를 추정했다.
그 결과 상속·증여가 전체 자산 형성에 기여한 비중은 1980년대 연평균 27.0%에 불과했지만 1990년대 29.0%가 됐고 2000년대에는 42.0%까지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이 쌓은 자산이 모두 100만원이라고 치면 1980년대에는 27만원이 부모에게 상속받은 것이고 나머지 73만원은 저축 등으로 모은 것이었지만 상속으로 쌓인 자산이 20년 만에 42만원으로 불어난 것이다.
국민소득 대비 연간 상속액의 비율은 1980년대 연평균 5.0%에서 1990년대 5.5%, 2000년대 6.5%로 높아졌다. 2010∼2013년 평균은 8.2%로 뛰었다.
김 교수는 "어느 지표로 봐도 우리나라에서 상속의 중요성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이석인기자 silee@sporbiz.co.kr
한국에서 상속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해도 다른 선진국보다는 아직 낮은 수준이다.
전체 자산에서 상속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대 기준으로 독일(42.5%), 스웨덴(47.0%), 프랑스(47.0%), 영국(56.5%)이 한국보다 높았다.
국민소득 대비 연간 상속액 비율은 2010년대 연평균을 따졌을 때 스웨덴이 8.2%, 영국은 8.2%로 우리나라와 비슷했고 독일(10.7%), 프랑스(14.5%)는 더 높았다.
▲ 왜 2030은 이토록 가혹한 등급 분류를 하게 됐을까
SNS상에서는 수저계급론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까지 제시되고 있다.
자산 20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2억원 이상일 경우 '금수저', 자산 10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1억원 이상일 경우 '은수저', 자산 5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5,500만원 이상일 경우 '동수저', 자산 5,000만원 미만 또는 가구 연 수입 2,000만원 미만인 가정 출신을 '흙수저'로 나눈다.
흙수저 빙고게임도 유행하고 있다. TV와 승용차의 유무 같은 구체적인 가정환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수저등급을 찾아가는 게임이다.
25개의 기준 중 선택된 개수가 많을수록 흙수저에 가깝다는 논리다. '아르바이트 해본 적 있음' 'TV가 브라운관이거나 30인치 이하 평면TV' 등 등급을 나누는 기준 역시 구체적이다.
젊은 세대가 이렇게 가혹한 등급 분류를 하게 된 이유를 두고 전문가들은 '88만원 세대' '3포세대' '5포세대' 등으로 불리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2030 청춘들이 '노력해도 바뀌는 게 없다'는 자조 끝에 수저계급론을 만들어냈다고 분석한다.
취업준비생 윤나경(24)씨는 "수저계급론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며 "사회가 구분지은 기준이 주어진 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다.
수저계급론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계층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심리가 팽배해 있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현실을 뼈아프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의 자조적 놀이로만 끝나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다.
김서연 기자 brainysy@sporbiz.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