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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열정 페이

입력
2015.11.1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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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일부 악덕 자본가들이 청년 세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써먹던 논리다. 그들은 말한다: “너는 열정이 있으니까, 또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네가 일한 거에 대해서 돈을 아주 조금만 줘도 된다.” 그들은 종종 열정이란 말 대신에 재능, 재주, 끼 등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열정 페이가 횡행하는 배경은 무엇보다도 저성장, 높은 체감 실업률, 불안정 노동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정 혹은 정열이란 말은 동북아 근대에서 서구어 ‘passion’의 번역어로 등장했는데, 그 어원은 ‘겪다, 견디다, 버티다’는 뜻을 갖는 라틴어 동사 ‘pati’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오늘날 영어로 ‘passion’ 또는 ‘suffering’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동북아에서는 ‘passion’의 번역어 후보로 열정 내지 정열 외에 정욕, 번뇌, 극정, 격정 등이 제시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 고전 그리스의 사상에서는 인간의 정신 내지 마음은 능동적이고 이에 반해 육체 및 그것에 바탕을 둔 감각과 감정은 수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발상은 오늘날 ‘passive’(수동적인)란 말에도 반영되어 있다.

서구에서 상당 기간 동안 ‘passion’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열렬한 감정 내지는 정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뜨겁게 흐르는 땀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마 앞에서 수동적으로 흘리는 것과 러닝 머신 위에서 능동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과 비슷한 이치다. 비록 그 생화학적 성분이 같을지라도 말이다.

데카르트 시절까지만 해도 ‘passion’은 정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감정, 정념, 정서 일반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 즈음 ‘emotion’이란 단어도 함께 쓰기 시작했는데, 외부 환경의 자극으로 인해 생겨난 내부의 감정적 움직임이나 동요(motion)가 너무 강해서 신체 밖으로(ex) 드러나는 것을 뜻했다. 그러다가 ‘passion’이 오늘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대체로 근대적 로맨스 관념과 연결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passion’은 열정적 사랑이나 애착의 감정적 기초가 된 것이다.

1960년대 및 70년대에 유소년기 및 청년기를 보낸 내 세대는 ‘정신력’이란 말을 지겹게 들어 왔다: “정신력으로 버텨, 정신력으로!!!” 더불어서, 투지라든가 헝그리 정신이란 말도 자주 들어가면서 고단한 삶을 버텨야 했다. 한때 한국 축구는 개인기 및 넓은 시야, 부분 전술, 전략보다는 선수들의 투지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헝그리 정신을 전형적으로 대변하는 스포츠인 복싱이 매일 스포츠신문의 일면을 장식한 적도 있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1970년대 구호는 한국적 압축 성장 내지는 산업 근대화에 필요한 국민들 전체의 사회적 열정을 파쇼적으로 호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OECD에 가입한 이후로 그런 말이나 구호는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삶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초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최근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은 헬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개발도상국에 가서 한 달만 지나보면 금방 깨닫는 게 국민적 자부심”이라며 반박한 바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우리나라는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대단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청년들은 헬조선이란 자학적 분위기에 빠져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 정치인의 말은 내 귀에 ‘열정 페이’의 변종으로 들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자부심이 있으니까, ‘N포세대’여도 된다”. 자부심이 있으니까 일자리가 없어도 되고, 결혼이나 연애를 못해도 되고, 애를 못 낳아도 되고, 집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다. 혹은 그런 것들이 없어서 불만이라면 단지 자부심만 가지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얘기다.

나는 이들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니가 가라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는 국정교과서를 쓰고 있고,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총에 맞아 죽는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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