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뜨겁다. 정부는 이 정책을 무슨 특공작전을 벌이듯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머지않아 스스로 역사의 기록이 얼마나 냉정한 것인지 깊이 깨닫게 될 일을 대책 없이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치 공방을 목도하면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일 하나가 떠오른다. 올해로 꼭 20년이 되는 이른바 ‘5ㆍ31 교육개혁’이다. 이 개혁안은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보고 형식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창의력과 수월성 제고’ ‘다양화’ ‘특성화’ 등 그저 듣기 좋은 말로 분칠한 채 홀연히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가 마련한 개혁안의 제목에 날짜를 끌어다 붙였을까. 보통 정책 내용의 특징을 드러내어 명명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개혁의 목표나 핵심 전략을 감추기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5ㆍ31 교육개혁안 발표 당시 그 본질 내지 실천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보적인 교원단체조차 ‘다양화’ ‘자율화’ 등의 현란한 말에 현혹되어 개혁안의 ‘진보적 계기’ 운운하면서 얼마 동안 협력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5ㆍ31 교육개혁안이 시장주의에 기초해있으며, 핵심 전략이 공교육 시장화와 학교 민영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교육 재정 감축”과 “기업 일변도의 사회 조건을 공고화하는 의식의 재생산”이라는 개혁의 목표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졌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 교육의 병증을 진단하여 처방한 것이 아니라 외국의 개혁 모델을 수입해왔다는 점이다. 일본이나 미국이 아니라 시장주의 교육정책의 본산인 영국에서였다.
공교육 시장화는 학교와 교원을 ‘교육 서비스’의 공급자로, 학생ㆍ학부모ㆍ기업을 소비자로 비유하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공교육 체제에 시장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비용-편익의 효율성을 제고해야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 소비자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공급자 간의 경쟁을 유발시켜야 교육의 질이 제고된다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가설에서 나온 것이다. 학교 선택권 등이 강조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학교 민영화는 아주 노골적인 공교육 재정 감축 전략이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 사학을 늘리면, 그만큼 교육 재정을 줄일 수 있다는 셈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립(율)형 사립고와 국제중 도입 정책이다. 교육과학기술장관을 지낸 이주호 경우 2002년 발표한 글에서 “중등학교의 30% 정도까지 자립형 사학으로 전환시키자”고 했을 정도였다. 국립대 법인화 역시 같은 취지의 정책 구상인데, 장관 시절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특수법인화에 집착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개혁을 원하는 걸까? 기업과 부유층으로, 이들은 오래 전부터 교육 복지 등 복지 국가 유지 비용을 자신들이 감당해왔다면서 정책 전환을 요구해왔다. 영국의 경우 1979년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집권함으로써 최종ㆍ최대 소비자인 기업의 이해를 교육 정책에 배타적으로 반영하는 한편, 부유층의 계층 차별적인 교육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지극히 비교육적인 정책의 무분별한 수입이 바로 5ㆍ31 교육개혁이었던 셈이다. 이런 일이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 폐해로 인해 정책 전환을 꾀하던 199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문제는 5ㆍ31 교육개혁안이 결코 ‘과거의 문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민의 정부’는 ‘문민정부’의 교육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승계했다. ‘참여정부’는 문서상으로는 정책 전환을 천명하였지만, 끝내 시장주의 세력에 포획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명박정부 출범을 계기로 시장주의 교육 정책이 전면화되는데, 박근혜정부의 교육정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5ㆍ31 교육개혁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꼭 기억하고 바로잡아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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