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돈은 기반암 같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다른 ‘무한도전’ 멤버들을 받쳐주면서 은근히 웃긴다. 그래서 정형돈이 빠진 ‘무한도전’이 상상이 안 간다’(네티즌-마*).
방송인 정형돈(37)이 불안장애를 이유로 방송 활동을 전면 중단하자 그의 공백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한 때 ‘웃기는 거 빼고 다 잘한다’란 소릴 듣던 ‘예능 천덕꾸러기’였지만, 그가 방송에 알게 모르게 뿌려둔 웃음 씨앗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정형돈이 활약했던 MBC ‘무한도전’을 비롯해 JTBC ‘냉장고를 부탁해’ 등엔 비상이 걸렸다. ‘어색한 뚱보’에서‘미존개오(미친 존재감 개화동 오렌지족)’를 거쳐 ‘예능 4대 천왕’까지… 2002년 KBS 17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정형돈의 예능 성장사를 정리했다. 불안장애로 자신의 웃음은 챙기지 못했지만, 시청자의 ‘웃음 폭탄’을 자처했던 그의 결정적 순간들이 담겼다.
‘심은하 머리’한 ‘뚱보’… ‘갤러리정’의 ‘몸개그’
“웨이러 미닛(Wait a minute)~”. 단발머리를 한 뚱뚱한 사내의 능청스런 표정 연기는 압권이었다. 정형돈은 2002년 KBS2 ‘개그콘서트’의 간판코너였던 ‘봉숭아학당’에서 갤러리정으로 나와 인기를 누렸다. 키 170cm 남짓에 98kg의 체중. 그의 ‘몸개그’가 빛을 발했던 시기다.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신이 내린 완벽한 머리 결”이라며 단발머리를 하고 ‘심은하 머리’라 우겼던 넉살도 웃음 포인트 중 하나였다. 배꼽에 동전을 끼워 넣기도하고, 장기알 중 ‘왕’을 밀어 넣으려다 배꼽이 찢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였던 것도 이 때다. 정형돈이 민 개그코드는 ‘유치 개그’였다. 영화 ‘벤허’를 표현한다며 “신이시여, 이 배가 제 배란 말입니까”라고 하면 동료가 옆에서 “야 배 너”라는 식으로 개그를 해 웃음을 줬다. 항상 ‘봉숭아학당’ 속 세바스찬(임혁필 분)에게 “천박해, 천박해”라는 힐난과 함께 눈총을 받았던 때다. ‘갤러리정’ 외에도 “아하, 그렇구나”라고 합창을 하던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도레미트리오’에서도 그는 주머니 속 송곳처럼 돋보였다.
“뜨고 싶어?” ‘무한도전 가요제’의 미친 존재감
‘개그콘서트’를 나온 정형돈은 한동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짜인 대로 연기를 하면 되는 공개 코미디와 달리 자신의 분량 확보를 위해 순발력 있는 대처가 중요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이다. 2006년 ‘무한도전’의 멤버가 됐을 때도 정형돈은 노홍철 박명수 등에 치어 한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가 ‘무한도전’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순간은 바로 ‘가요제’ 때다. 음원 성적과 달리 웃음의 농도에 있어서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래퍼 지드래곤을 비롯해 작곡가 정재형과 짝을 이뤄 예상치 못한 큰 웃음을 줬던 이가 바로 정형돈이다.
그는 2013년 열린 자유로 가요제에서 아이돌인 지드래곤을 쥐 잡듯이 잡아가며 웃음을 줬다. “보고 있나, 지드래곤?”이라며 평소 지드래곤의 패션 감각 등을 지적하는 만행(?)을 저질러 오던 그는 “나랑 해서 뜨고 싶냐?”는 정체 불명의 거만함으로 웃음을 쏙 뺐다. 정형돈은 프랑스로 피아노 연주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 강단에 섰던 정재형이 2011년 서해안고속도로가요제에서 만든 음악을 두고 “쓸 데 없이 고퀄(고퀄리티)”이라며 면박을 주며 웃음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웃음뿐 만이 아니다. 그는 기대 이상의 랩 실력과 예상치 못한 가창으로 노래에 힘을 실어 폭발력을 키우기도 했다. ‘순정마초’와 ‘해볼라고’가 특히 인기를 누렸다.
“돌발 웃음의 저격수” MC거목의 발견
올해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로 꼽히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빛낸 건 최현석 등 유명 셰프가 전부는 아니다. 정형돈은 감칠맛 나는 진행으로 방송의 재미를 살렸다. 동료 진행자 김성주와 함께 게스트들의 냉장고를 보여주면서 주고 받는 입담은 ‘냉장고를 부탁해’의 백미였다. 김성주가 셰프들의 요리하는 모습을 스포츠 중계처럼 박진감 넘치게 살려줬다면, 그 모습에서 포인트를 잡아 캐릭터를 만들고 돌발 웃음을 주는 게 정형돈이었다. 냉장고 속 음식에서 게스트의 특성을 살펴 새로운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도 그였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요리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형돈의 진행 능력도 큰 역할을 했다. 항상 남 옆이나 뒤에서 웃음 감초 역을 했던 그가 진행자로서의 큰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바로 이 프로그램이었다.
원조 ‘개가수(개그맨+가수)’…정형돈의 찬란한 B급 감성
‘어제 헤어진 여자 듣지마/너는 울고 있겠지만/걔는 웃고 있어.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너만 울고 있어 듣지마’(‘안 좋을 때 들으면 더 안 좋은 노래’)
정형돈은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정형돈은 예능프로그램 밖에서도 웃음을 줬다. 형돈이와 대준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정형돈은 래퍼 데프콘과 듀오를 이뤄 ‘개가수’로도 활약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넉살과 위트를 가사에 담아 개그하듯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B급 코드’의 정수를 보여줬다. 노란색 금 목걸이에 사채업자들이 주로 들고 다닌다는 ‘일수가방’을 들고 껄렁하게 랩을 하는 그의 모습에 많은 시청자와 음악 팬들이 폭소했다. 정형돈은 ‘올림픽대로’란 노래에서 ‘올림픽 대로가 막혀요 지금은 어딜 가나 막혀요 내 인생도 니 인생도 우리 인생도 다 막혀요’라는 노랫말로 취업난에 고개 숙인 젊은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유머로 기름칠 해 정서적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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