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1992년부터 4년 동안 국회의원을 지냈던 코미디언 고 이주일(본명 정주일)씨가 1996년 국회를 떠나며 남긴 말이다.
정치처럼 웃기는 코미디가 없다는 풍자인 동시에, 그만큼 정치와 코미디는 밀접하다는 의미도 담았을 것이다. 그가 방송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맡은 프로그램은 공교롭게도 미 NBC의 정치풍자토크 ‘투나잇쇼’를 모방한 ‘이주일의 투나잇쇼’였다. 어쩌면 정확히 자신이 말한 ‘코미디=정치’의 공식을 따른 셈이다.
‘투나잇쇼’ 제작 방송사인 NBC가 만드는 또 다른 코미디 프로‘새러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ㆍSNL)’는 선거 시즌이 되면 유명 정치인들이 출연을 위해 줄을 서고 있어 ‘코미디의 정치학’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도 민주,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자 가운데 선두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과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잇달아 쇼에 등장했다. 이들이 SNL에 출연한 이후 그 파급력이 워낙 강력해, 일각에선 이들에게만 특별한 ‘유세 기회’가 주어져 불공평하다는 지적이 나올 지경이다.
클린턴, 트럼프 잇따른 출연으로 유세
지난 7일 방송된 SNL에서 호스트(주 출연자)로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는 ‘물 만난 물고기’였다. 2004년부터 방송된 인기 리얼리티쇼 ‘어프랜티스(견습생)’에 출연하는 등 그 동안 사업가보다 연예인의 이미지가 강했던 트럼프는, 올 6월 대선출마 선언 후 NBC와 각종 출연 계약이 끊겨 서로 등을 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SNL에 출연해 과거 어떤 정치인보다 인상적인 입담을 과시하며 주말 프라임 타임 1시간 30분을 장악했다. 멕시코 이민자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인종주의적 발언 때문에 방송에 앞서 하원 이민특별위원회로부터 트럼프의 출연 철회 요구를 받는 등 SNL 출연이 부당하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지만, 이날 트럼프가 출연한 SNL은 전국 시청률 6.6%를 달성해 2012년 이후 SNL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 언론들의 추산에 따르면 전국에서 무려 1,000만명이 트럼프의 쇼를 지켜봤다.
붉은 넥타이를 매고 무대에 오른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추켜세우며 “엉망진창으로 꾸려지는 현 정부의 재정을 새롭게 짜 경제를 되살릴 것”이라고 말하는 등 정식 유세와 다름없는 시간을 가졌다. “머리를 만지는 데 3시간이 걸린다”고 말하며 그의 말투를 흉내 내는 출연자들과 농담을 하는가 하면 “어떻게 실업률을 낮출 것이냐”라는 질문에 “나는 굉장한 부자이다”라는 식의 부실한 답변을 내놓으면서도 기막히게 청중의 박수를 끌어냈다.
트럼프만큼은 아니지만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도 지난달 3일 SNL의 한 코너에 등장해 무대를 이용한 유세의 기회를 가졌다. 클린턴의 모습으로 분장한 코미디언 케이트 매키넌과 짝을 이뤄 ‘발(Val)’이라는 이름의 바텐더를 연기한 그는 “키스톤 파이프라인이 환경을 파괴할 것이라 믿는 평범한 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친환경적 공약을 강조하기도 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특히 경쟁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말투를 흉내내며 “그가 공화당 경선을 통과할 것이라 생각하느냐”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클린턴 역을 맡았던 매키넌은 “본선에서 (트럼프를) 짓밟아야 하니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블룸버그 등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만큼 능수능란하지 않았지만 “클린턴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던 유머감각을 동원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당신들 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줬다”고 분석했다.
“아이오와 코커스와 맞먹는 영향력”
‘SNL의 정치학’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1975년 SNL이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유명 정치인들은 SNL의 초대손님으로 등장해 자신의 정치 견해를 알리고 대중적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정치적 도구로서 SNL의 역할에 대해 미 경제지 포천은 “지난 40여년 동안 SNL은 대선 주자들에게 아이오와 코커스와 맞먹을 만큼 중요한 통과의례였다”라고 의미를 부여할 정도다.
이번 트럼프의 출연은 현재까지 그가 유세에 투자한 550만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막말 논란을 계속 일으키는 도널드 트럼프를 흥행만을 생각해 호스트로 불러들인 SNL에 대해서 비판도 적지 않다. 워싱턴포스트(WP)는 “깜짝 출연으로 끝나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프로그램 내내 트럼프를 바라봐야 하는 유감스러운 밤이었다”고 밝혔다. 일부 정치인들에게만 무대를 빌려주는 NBC는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대선관련 지침을 위반한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미국의 기업소식 전문지 애드위크는 “FCC의 방침에 따르면 한 대선주자가 토론회나 뉴스가 아닌 일반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실상 유세를 할 경우 경쟁자 측에서 같은 분량의 방송을 요구한다면 방송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라며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SNL에 출연한 정치인들의 성적이 그 동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트럼프를 따르겠다고 무작정 SNL의 문을 두드리는 정치인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다. 유명 정치인 가운데 SNL의 첫 테이프를 끊은 인물은 닉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제럴드 포드. 재선을 위한 선거를 불과 7개월 앞둔 1976년 4월 포드 대통령은 SNL에 등장해 닉슨에 대한 특사로 주저앉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했다. 1996년엔 도널드 트럼프와 비견되는 재벌 대선 경선 후보였던 스티브 포브스 역시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쇼의 호스트로 등장했다.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좌중을 흔들었지만, 그를 향할 것이라던 표심은 대부분 밥 돌 후보에게 넘어갔다. 2003년 SNL에 나왔던 시민운동가 알 샤프톤도 2004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다.
WP는 “SNL에 대선 주자들이 가장 많이 몰렸던 때는 각 당 경선이 불붙은 2007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로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은 물론 존 매케인, 세라 페일린까지 대부분 주요 후보가 짧게나마 무대에 올랐다”라며 사실상 SNL이 대선 레이스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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