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 신참 기자 변신
천재는 아니어도 연기 영재에 속하는 줄 알았다. 16세에 TV드라마로 배우 데뷔식을 치렀고, 19세에 영화 ‘과속스캔들’로 스타가 됐으니까. 적어도 그의 연기력을 둘러싼 논란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화려한 미모로 대중의 시선을 붙들기보다 정성 들인 연기로 관객 마음을 움직이는 배우라는 확신이 강했으니까.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 연기 제대로 못한다고 많이 혼났다”고 했다. “어느 감독님한테는 시나리오책으로 머리를 얻어 맞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최근에서야 혼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천하의 박보영도 연기 때문에 울고 또 우는구나….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25일 개봉)는 스포츠신문 연예부 수습기자 도라희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뭐든 잘해낼 자신은 있으나 여전히 서툰 사회초년병을 통해 이 시대 청춘의 성장통을 그린다. 막말을 퍼붓는 상사 하재관(정재영)과 일하며 기자로, 좀 더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도라희의 모습은 20대 중반을 막 넘어선 박보영의 현실과도 맞닿아있다. 13일 오전 서울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보영은 여전히 화사하고 앳된 얼굴이었다. 긍정의 힘이 넘쳐나는 목소리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사회적 성장이 느껴졌다.
-취재대상에서 취재하는 기자가 된 기분은 어떤가.
“재미있었다.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이 3개월 정도씩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소녀(‘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가 되기도 하고 일진(‘피끓는 청춘’)이 되었다가 이렇게 직장 다니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번에는 제 또래 이야기라서 더 재미가 있었다.”
-최근 출연작이 많다.
“목표가 다작이었다(웃음). 올해 유난히 작품이 좀 많다. 영화 ‘돌연변이’는 내가 많이 나오지도 않고 영화 규모도 작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촬영 들어가기 전 짬이 나서 출연한 영화다. 예상치 않게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에 출연하게 됐는데 드라마는 바로 방송이 되다 보니 최근 출연작이 이어진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친구들로부터 사회 생활 애환을 듣고 연기에 반영했나.
“딱히 취재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친구들이 26세인데 1,2년 전부터 다들 취업했거나 취업 때문에 크게 고민하고 있다. 만나면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가 직장이다. 어느 회사에 입사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직장 상사가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문자로도 주고 받는다. 도라희의 연차가 3,4년 정도 됐으면 배역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했을 텐데 신참이니 부딪히는 식으로 연기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도 했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에 노출되다가 그런 기사를 쓰는 역할을 맡게 됐는데.
“기자들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래도 조심스럽다. 기자들마다 성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3개월 동안 촬영하며 도라희를 통해 겪은 일들이 기자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도라희를 연기하며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배우인 나는 (내가 일하는) 책상이 없다. 촬영장에서 도라희 책상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선 ‘내 책상’이라고 표기해놓았다. 배우가 앉아있는 직업이 아니니까, 내 책상이 생긴 게 신났다. 직장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 선배들이 화낼 때 책상 앞에 앉아있는 생활이 참 고역이겠구나 생각을 하게 됐다.”
-도라희처럼 촬영장에서 혼난 경험이 있나.
“엄청나게 많다. ‘네 직업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라’ ‘집에 가라’는 식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울지 않을 테야’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감독님한테는 시나리오 책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힘들었으나 연기를 못했으니까 받아들였다. 선배님들이 따스하게 대해줘서 이겨냈다. 내가 기죽어 있으면 선배님들이 오셔서 토닥여줬다. 감정에 빨리 몰입하지 못하면 선배님들이 ‘애는 아직 어린데 시간을 좀 줘야지’라고 말해주곤 했는데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 어떤 일이든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연기 못한다고 혼났나.
“얼마 전까지 그랬다. 정확하게는 말 못한다(웃음).”
-영화 속 하재관의 말처럼 열정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나.
“정재영 선배는 촬영장에서도 다 된다고 말했는데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정재영 선배 세대에게는 열정이 긍정적인 의미였다. 내가 어렸을 때도 열정은 좋은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내가 성년이 되고 나선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우리 세대에는 부정적이다. 요즘은 족쇄와도 같은 단어가 됐다. 너희는 열정이 있으니까 당연히 무엇을 하라는 말이 된 것 같다.”
-열정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신념이 중요하다.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많이 휩쓸렸다. 팬들 중에는 영화만 했으면 좋겠다는 경우도 있고 드라마만 하기를 원하기도 한다. 최근 내가 신념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훨씬 마음 편안하고 일할 때 단단해진 느낌이 든다.”
-연예계에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나.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광수, 김기방, 차태현 선배는 필터를 안 거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귀여운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 ‘돌연변이’의 주진을 연기했다. 매우 거친 인물이라서 출연을 결정했다. 항상 의문스러운 것이 내가 밝은 역할을 한 적이 없는데도 다들 밝은 이미지를 지닌 배우라고 여긴다. ‘오! 마이 귀신’에 출연한 이유는 제대로 밝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너무 밝고 귀엽게 보인다고 해서 나도 그렇지 않은 역을 택하려고 한다.”
-연기한 지 만 9년이 됐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나.
“연기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한 10년은 더 해야 알 것 같다.”
-도라희는 술 한잔에 취하는데 실제로도 술에 약하나.
“술은 잘 못 마시는데 촬영장에서 술자리가 있으면 항상 간다. 소주 한잔을 마시려면 세 번 정도 나눠서 마신다. 한잔을 마시면 취하고 잠이 온다. 졸다가 다시 일어나 좀 멀쩡해지면 또 조금 마신다.”
-예전에 ‘추격자’ 속 하정우 모습이 너무 무서워 하정우를 먼발치에서 보고 도망쳤다는데 요즘은 어떤가.
“장례식장에서 뵙고 공포감을 덜었다. 연기 잘하시는 선배들 보면 영화 안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나는 아직 그렇게 되기엔 멀었지만 나중에 관객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제대로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듯하다.”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는데 힘들어도 내색을 않는 편인가.
“개인적으로 힘들어도 굳이 대중 앞에서까지 표현해야 될까 생각한다. 내색을 안 해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상대방이 그걸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안 좋은 일들은 툭툭 털어내려 한다.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기운을 전해주고 싶다.”
-기분 전환을 위한 자기만의 비결이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큰 비련에 빠진 주인공이 되어 집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누군가를 만나서 울고 그 사람이 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혼자서 마음 놓고 운다. 집에 인형이 많은 데 슬픔을 담당하는 인형이 따로 있다. 혼자 울기 외로우니 슬픔을 담당하는 인형을 안고서 운다. 나의 상황을 이해해줄 것 같은 눈빛의 인형이다. 침대 위 수면 담당 인형도 있다. 왠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밤이면 해가 뜰 때까지 잠을 못 잔다. ‘오 나의 귀신님’에 출연하며 귀여운 귀신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 귀신에 대한 공포는 좀 덜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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