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사회가 오너인 김승연(63) 회장의 장남에게 당사자도 모르게 계열사 주식을 저가 매각해 편법 경영권 승계를 도운 의혹에 대해 법원이 면죄부를 줬다. 이사회가 오너의 지시에 따라 거수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법원은 “아들에게 이익을 줬으나, 김 회장이 이익을 얻은 것은 아니다”는 등의 이유로 김 회장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 김기정)는 경제개혁연대와 한화 소액주주 2명이 “계열사 주식을 장남에게 저가로 넘겨 회사에 피해를 끼쳤다”며 김 회장과 전ㆍ현 임원진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1심은 김 회장의 책임을 인정, “김 회장은 한화에 89억6,6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었다.
한화 이사회는 2005년 6월 한화가 보유한 ㈜한화S&C 지분 40만주를 김 회장의 장남 동관씨에게 20억4,000만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한화S&C 전체 주식의 66.67%에 달하는 지분이었다. 동관씨는 자신이 주식을 넘겨받은 사실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알짜 정보통신(IT)기업 한화S&C의 최대주주가 됐다.
항소심은 “주식 매매를 동관씨가 모르고 있었기에 김 회장이 주도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면서도 “동관씨가 한화그룹 경영권을 승계시켜주는 이익을 얻었다고 해도, 김 회장 자신의 이익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당시 이사들이 모두 주식매매에 찬성했고 김 회장이 이사들에게 허위 정보를 제공했거나 이사들을 기망해 이런 매각 결의를 한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주식 매각 가격에 대해서도 “당시 회계법인에서 주식 가치를 다소 잘못 평가했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가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며 “원고가 주장하는 주식 적정가액은 모두 사후적 판단이고, 현저하게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팔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법원이 시대를 역행하는 판결을 내리며 한국기업의 지배구조 건전화에 발목을 잡고 있다”며 “대법원 상고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13년 1심은 “김 회장이 한화S&C 주식을 장남에게 저가에 매각하도록 지시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며 사건 당시 한화S&C 주식 1주당 가치가 적어도 2만7,517원에 달한 것으로 보고 매각 가격인 5,100원과의 차액인 89억원을 김 회장이 물어내도록 했다.
김 회장이 이 사건과 관련해 배임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확정 받은 데 대해서도, 1심은 “배임죄 성립요건과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의 성립 요건은 다르다”며 “형사사건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고 해서 손해배상 책임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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