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죽고 6년 지나 땅 소유권 청구
유언장 의심 기각한 1심과 달리
항소심 ‘사인증여’ 계약 효력 인정
독거노인 등 재산 갈취에 악용 우려
‘사인증여’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신도에게 불교식 장례를 치러준다고 약속한 후 ‘사망 뒤 부동산을 시주한다’는 유언장을 받아낸 승려가 약속을 어겼음에도 법원에서 계약 효력을 인정받았다. 증여자의 사망 뒤 효력이 생기는 사인증여 계약은 상속인에게 남기는 법정 유언장과 달리 본인이 직접 작성하지 않아도 되고, 당사자간 합의가 실제 있었다는 것만 인정되면 성립된다. 이번 판결은 사인증여가 독거노인이나 치매노인의 재산 빼앗기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은 가운데 나와 주목된다.
서울고법 민사34부(부장 최규홍)는 10일 한모(69)씨가 망인 이모씨의 상속재산관리인 함모 변호사를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 등기절차 이행 소송에서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이씨의 토지 소유권을 한씨에게 이전하라고 밝혔다.
한씨는 서울의 한 사찰 주지로 있던 2005년 5월 신도 이씨에게서 ‘유언장’이라 적힌 종이 한 장을 받아냈다. ‘이OO은 자식이나 친척이 없어 사망한 후 토지를 한OO에게 시주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6ㆍ25 전쟁 당시 홀로 남한에 내려 온 이씨는 혼자 살면서 서울 광진구 자양동과 중구 인현동에 각각 133.2㎡, 29.8㎡의 땅이 있었다. 한씨가 외롭던 이씨의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이씨는 “자신이 죽고 나면 49재 등 불교식 장례와 추모 절차를 이행해달라”는 조건 이행을 전제로 한씨에게 부동산 증여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2년이 지난 2007년 5월, 이씨는 숨을 거뒀다. 하지만 한씨는 이씨에게 관심을 끊었다가 6년이 지난 2013년 8월에야 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 한씨는 곧바로 서울가정법원에 망인이 된 이씨에게 상속재산관리인을 선임해 달라고 청구했다. 이씨의 토지 소유권을 이전 받으려면 후속 절차를 진행해 줄 법적 권한이 있는 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법원이 변호사 함씨를 재산관리인으로 선임하자, 한씨는 석 달 뒤 그를 상대로 소유권 이전등기 절차 이행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유언장 작성 경위를 의심하며 한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유언장을 이씨가 아닌 한씨의 부인 윤모씨가 대신 썼다는 점에서 증여자 본인의 의사대로 작성된 것인지를 세심하게 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의 인감 도장이 유언장에 찍혔고, 인감증명서도 한씨 부부가 들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또 이씨의 유언장을 쓴 작성자에 관해 한씨의 진술이 법정에서 번복된 점에 강한 의심을 품었다. 한씨는 상속재산관리인 선임 신청서에선 ‘망인이 당시 옆에 있던 다른 사찰 신도에게 부탁해 유언장을 작성하게 한 뒤 인감도장을 찍었다’고 적었는데, 법정에선 ‘자신의 처가 썼다’고 말을 바꿨다. 한씨의 아내는 소송 중 치매로 입원 중이어서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할 수 없는데다, 작성 당시 상황을 알고 있던 보살 3명도 모두 사망해 이씨 의사대로 유언장이 작성됐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무엇보다 1심 재판부는 “한씨가 49재 등 장례절차 이행을 대가로 이씨와 증여 계약을 맺었음에도 장기간 망인의 사망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서 “조건부 증여계약을 이행하지 않아 효력이 인정될 수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단을 깨고 한씨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이씨가 유언장 작성 9일 뒤 유언장에 찍은 도장을 인감으로 신고하고, 인감증명서를 발급 받아 한씨에게 건넸다는 사실 관계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이씨가 본인 의사에 따라 날인한 것으로 추단되며, 이를 뒤집을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비록 한씨가 49재 등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더라도 사인증여 계약에는 그 같은 내용이 명시돼 있지 않아 약속 불이행으로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경법원의 한 판사는 “사인증여 계약에 대한 판단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 사건인 만큼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석 법무사는 “누가 대신 써도 되는 법적 제한이 없는 사인증여 계약은 법정 다툼이 치열할 수밖에 없어,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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