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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가 좋다, 그러나 비싼 건 싫다"

입력
2015.11.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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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래버레이션이 촉발한 패션의 민주화는 새로운 럭셔리의 감각을 빚어냈다. ‘발망 대란’을 일으켰던 H&M과 발망의 컬래버레이션. H&M 제공
컬래버레이션이 촉발한 패션의 민주화는 새로운 럭셔리의 감각을 빚어냈다. ‘발망 대란’을 일으켰던 H&M과 발망의 컬래버레이션. H&M 제공

스스로 인상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류혜선(29)씨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발망의 디자인에 한때 관심이 많았다. 배우 김혜수가 입고 나와 몇 년 전 크게 히트했던 파워숄더 (치솟은 어깨 디자인)를 비롯해 강력하고 화려한 디자인이 발망의 특징. 류씨는 ‘세 보이는’ 발망의 옷이 자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 왔지만, 한 벌에 수백 만원에 이르는 옷을 사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잊고 지냈다. 그러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 H&M이 발망의 수석디자이너 올리비에 루스텡과 올해의 컬래버레이션(협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가 번쩍 뜨였던 것은 당연지사.

류씨는 사전 공개된 룩북(제품 화보)을 꼼꼼히 살폈다. 자신에게 어울릴 듯한 디자인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광주에 살고 있지만 때마침 서울에 갈 일이 있던 류씨는 컬래버 제품의 판매일인 5일 새벽 4시쯤 잠실 롯데월드몰의 H&M 매장 앞에 줄을 섰다. 긴 기다림 끝에 허용된 10분간의 쇼핑시간 동안 류씨가 구매한 것은 상의 세 벌, 하의 한 벌, 원피스 1벌에 귀걸이와 반지. 직접 입어볼 수 없어 사이즈 선택이 힘들었지만, 쇼핑은 만족스러웠다. 재질이나 디테일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뜻밖에 괜찮은 수준이었고, 디자인은 한눈에 봐도 딱 발망이었다.

그렇게 발망을 원한다면 카피 제품, 심지어 재질도 더 좋은 제품(실제로 국산 브랜드에서 발망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출시한 제품을 ‘시망’, ‘탐망’이라고 부른다)도 있는데, 왜 이 고생을 하느냐는 질문에 류씨는 잘라 말했다. “그건 디자인을 그냥 훔친 거잖아요! 짝퉁은 아무리 질이 좋고 예뻐도 짝퉁일 뿐이에요. 컬래버 제품은 디자이너가 자기 이름을 걸고 만든 거예요. 가격은 저렴하지만 한정 수량만 판매하기 때문에 희소성도 유지되고요.”

럭셔리를 원한다, 하지만 너무 비싼 건 싫다. 럭셔리가 좋다, 그러나 흔한 것은 싫다. 전 세계가 열광한 발망과 H&M의 컬래버레이션은 럭셔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자세를 보여준다. 집을 팔아서라도 사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럭셔리 제품에 달려드는 애티튜드는 이제 더 없이 촌스러워졌다. ‘살 수 있는 것만 엄선해서 반드시 산다.’ 컬래버레이션이 럭셔리의 정의를 새로 쓰고 있다.

유니클로와 에르메스 디자이너 출신 크리스토퍼 르메르의 컬래버레이션. 유니클로 제공
유니클로와 에르메스 디자이너 출신 크리스토퍼 르메르의 컬래버레이션. 유니클로 제공

줄을 잇는 컬래버레이션

컬래버레이션이 풍년이다. 참신한 조합과 흔해빠진 조합, 파괴력 있는 디자이너와 이름만 빌려주는 연예인까지 다종다양한 합종연횡이 컬래버라는 코드로 패션계를 지배하고 있다. 컬래버라고 다 같은 컬래버가 아니다. 도대체 저런 걸 왜 했나 싶은 컬래버는 소리 소문 없이 묻히고 사라진다. 패셔니스타 연예인들이 디자인에 참여한 컬래버는 특히 시큰둥하다. ‘입은 게 예쁘다는 거지 만든 게 예쁘다는 거 아니거든.’ 노숙 패피(패션피플)들을 양산하며 ‘발망 대란’을 일으킨 H&M의 컬래버레이션처럼, SPA 패션이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와 만났을 때 대중들은 가장 뜨겁게 반응한다. 접근 가능한 럭셔리(accessible luxury), 구매 가능한 럭셔리(affordable luxury)가 작금의 패션 화두다.

세계적으로 첫 시도였던 H&M의 컬래버레이션은 2004년 우연히 시작됐다. 스웨덴 브랜드인 H&M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특히 중요한 브랜드. 시즌을 앞둔 어느 날 본사 디자인실에서 ‘고객에게 깜짝 놀랄 만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는 컬렉션이 뭘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누군가 ‘누구나 원하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우리 고객을 위해 디자인을 해준다면 어떨까?’ 아이디어를 내놨다. 오호라!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게 제안했다. 놀랍게도 흔쾌한 동의가 떨어졌다. 이때 라거펠트는 패션어록에 오른 유명한 말을 남겼다. “디자인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스타일의 문제다.” 그렇게 시작된 H&M의 컬래버는 스텔라 매카트니, 로베르토 카발리, 꼼데 가르송, 소니아 리키엘, 베르사체, 이사벨 마랑, 알렉산더 왕을 거쳐 발망에까지 이르게 됐다.

콧대 높은 뉴욕의 패션피플들도 한겨울 매장 앞에 줄을 서도록 만든 성공적 컬래버레이션은 H&M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앤-소피 요한손 H&M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는 “우리의 컬래버레이션은 패션의 축제라고 생각한다”며 “소유할 기회가 없었던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H&M을 통해 경험해볼 수 있는 세상을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패션을 오픈해 전 세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함으로써 패션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물론 H&M과 디자이너에게도 윈윈이 되는 작업이다. 디자이너는 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임과 동시에 자신의 디자인이 얼마나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수 있고, H&M은 저렴한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정체성 위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럭셔리한 이미지를 얹을 수 있다.

이 같은 컬래버 전략은 유니클로에서도 빈번히 찾아볼 수 있다. 지난달 에르메스의 여성복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르메르와의 컬래버로 편안하지만 감각적인 디자인의 니트와 아우터를 선보였던 유니클로는 최근에는 보그 파리 편집장 출신의 패션 브랜드 컨설턴트 카린 로이펠트와 호피무늬 퍼코트, 슬림핏의 오피스룩을 대거 선보였다. 에르메스 스타일을 일상복 가격으로 살 수 있는 르메르와의 컬래버는 명동 매장 앞에 1,000명 이상이 줄을 서고, 온라인에서 오픈 3분 만에 품절됐을 정도로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유니클로는 12월 추가 수량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H&M과 발망의 컬래버레이션.
H&M과 발망의 컬래버레이션.

살 수 없다면 명품이 아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최근 ‘중간 가격대 가방이 뜬다’는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다. 우리 돈으로 500만원에서 1,000만원이 훌쩍 넘는 샤넬이나 에르메스 대신 100만원 안팎의 중간 가격대 럭셔리 핸드백이 인기가 높을 뿐만 아니라 가장 패셔너블한 가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방 가격의 끝 모를 인플레이션에 대한 피로감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이 빚어낸 새로운 패션감각이라며 마이클 코어스나 코치 같은 브랜드를 예로 들었다. 러시아 부호의 아내이자 유명 패셔니스타인 엘레나 페르미노바가 “에르메스 버킨백은 너무 비싸서 갖고 있지 않다”고 쿨하게 말하는 게 더 없이 세련된 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구찌나 루이비통, 생로랑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도 낮은 가격대의 엔트리군 제품을 대거 늘리며 이 같은 기류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 너나 없이 샤넬과 에르메스에 목을 맸으나, 사고 보니 천편일률인 이들 럭셔리 클래식이 더 이상 패셔너블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텔레그래프는 마이클 코어스를 일컬어 “가치를 낮추지 않으면서도 럭셔리를 민주화하는 방식을 찾아냈다”고 치켜세웠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보면 H&M의 발망 대란은 ‘된장족들의 지나친 명품 사랑’으로만 폄하될 일이 아니다. 발망 대란은 판매 개시 3시간 만에 거의 모든 제품이 솔드아웃 되면서 사실상 끝이 났다. 현재는 6일간의 노숙 대장정 중 앞줄을 장악했던 리셀러들이 온라인에 풀어놓은 물량들이 수십 만원의 웃돈이 붙어 거래되고 있는 중이다. 줄 서기를 맨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 너무 일찍 집을 나섰다 뿐이지 한국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다. 영국에 체류 중인 조민우(28)씨는 런던 H&M 매장 앞에 16시간 동안 줄을 섰다가 발망 재킷과 티셔츠 등을 구입했다. 어림짐작에 1,000명 정도는 줄을 서 있었다고. “영국도 더하면 더했지 조용하진 않았어요. 발망은 브랜드가 가진 색깔이 뚜렷하잖아요. 한국에서 팔리고 있는 ’시망’이나 ‘탐망’ 제품을 사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주변에서도 ‘그걸 사다니 대단하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요. 저렴한 가격으로 디자이너 브랜드의 신념을 느껴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컬래버의 매력이에요.”

이렇게 착한 럭셔리를 줄 안 서고도 살 수 있게 대량 출시해주면 안 될까. “우리는 컬렉션을 통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쇼핑시간을 나누고, 각 아이템 중 동일한 제품은 한 피스만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컬래버레이션의 인기가 이토록 높은 데에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특수성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H&M의 공식 답변이다. 럭셔리가 좋다. 그러나 과도하게 비싼 것은 안 된다. 디자이너의 철학과 감각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누구나 입고 있는 것은 싫다. 새로운 감각의 지향점들이 얽히고 설키며 빚어낸 충돌, 그것이 발망 대란이다. H&M은 그 욕망의 접점을 정확하게 공략했다. 지금 럭셔리는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규희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학 4년)

유해린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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