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가을이었어요. 학교에서 공지가 왔는데, 독서 강좌였어요. 아이들한테 책 읽히는 방법이나 배울까 해서 나갔죠. 그날부터 모든 게 변했어요.” 박미경씨가 말한다. 학교는 서울 노원구에 있는 상경초등학교, 그는 학부모였다.
마들은 본래 말들의 땅이었다. 조선 때 여기 역참이 있었다. 넓게 초지가 펼쳐지고, 말들을 풀어놓아 살찌게 했다. 말들은 자유롭게 놀면서 저 홀로 다리에 힘을 붙이고, 쓰일 일이 있을 때에는 힘차게 달렸을 터이다. 수락산은 네 계절 모습이 모두 빼어나고 곱다. 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시원하고 거침없다. 신속할 때에는 마음이 저절로 씻기는 듯하고, 완만할 때에는 생각이 고요히 깊어지는 듯하다. 김시습이 초막 지어 숨어살고, 박세당이 제자 두어 글방을 이룬 뜻이 웅숭깊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웃음소리가 청명한 하늘에서 부서진다. 가을이다. 아이들은 정말 대단하다. 학습의 무게 속에서도 자유의 형식을 끊임없이 발명한다. 틈나면 공을 차고 고무줄을 논다. 딱지를 치고 그네를 타고 수다를 떤다. 학원들 수천 곳이 즐비한 사교육의 땅 노원에서도, 부모가 정한 궤도만을 달리는 아이는 극히 드물다. 자율을 연습하지 않으면 나중에 홀로 설 수 없음을 본능으로 알고 실천한다. 이 들을 마음껏 달리던 말 같다. 김광미씨가 말을 잇는다.
“북스타트코리아 이경근 실장님 강의였어요.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눈물을 쏟았어요. 놀 자유, 읽을 자유를 강제로 빼앗긴 아이들이 공부는커녕 부모와 사이가 점점 틀어지고 저들끼리도 삭막해지면서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걸 보았죠. 아이들한테 못할 짓 하고 사는 기분이 들었죠.”
감격과 죄책에 떨고 있을 때, 이 실장이 같이 모여 책 읽는 모임을 제안했다. 마법에 홀린 듯 너도 나도 이름을 적었다. 초등학교 이름을 단 특이한 독서공동체 상경다락방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부모가 책을 읽자 아이가 달라보였다
초등학교 부모 독서모임은 만들어지기 쉽지만 유지되기는 상당히 어렵다. 반 모임은 반이 갈리면 흩어지고, 곧잘 참석하다가도 아이가 졸업하면 모임에 발을 끊는다. 젊은 피를 한 차례 수혈했지만, 상경다락방이 세 해째 이어지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아이들 돌보고, 집안일에 치이고, 온갖 자질구레한 것을 챙기다 보면, 시간은 저절로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정신은 흐트러져 멍 때리기 일쑤다. 책을 읽는 사치를 부리기는 어렵다. 문미성씨가 이야기한다.
“처음 언니가 모임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할 수 있을까 싶었죠. 문득 결혼 이후에는 나를 위해 읽은 책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게 허망한 기분이 들어서 일단 모임에 나오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로 읽은 책이 ‘걱정을 걸어 두는 나무’였어요. 어린이책이지만 어른인 제가 읽어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묘한 성취감이 생겼습니다. 계속하고 싶어졌어요.”
아이들은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기쁨과 슬픔, 자랑과 걱정 등을 털어서 하루를 온전하게 만든다. 창조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에서 온다. 아이들이 항상 기발한 것은 어제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하루를 말할 때 공부나 하라든지, 잠이나 자라든지 하면서 잔소리를 던지면 어제가 고스란히 아이 마음에 남아서 현재로 충만한 마음이 사위어버린다. 아이에게서 창조를 빼앗는 짓이다. 부모는 ‘걱정을 걸어 두는 나무’가 되어야지 시끄러운 메가폰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오선미씨가 말을 받는다.
“하지만 어린이책을 주로 읽는 건 아닙니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느껴보려고 추천도서에서 가끔씩 고르는 정도예요. 아이 위주로 책 읽는 일은 싫습니다. 책은 전적으로 ‘나를 위해’ 읽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 혼자 책 읽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생각이 아이로 좁혀지면서 점차 나 자신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모임에서 매주 같이 책을 읽으면서 삶의 흐름이 달라졌죠. 재미가 커졌어요. 끌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달라보였어요. 사실, 아이는 바뀐 게 없죠. 제가 바뀐 거예요.”
결혼하며 멈춘 나의 시간 되돌리기
부모는 결코 아이에 맞추어 살아선 안 된다. 아이가 부모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병폐는 이 기묘한 역전에서 나왔다. 사교육비에 휘청하는 가계만 문제는 아니다. 아이들 공부를 중심으로 삶이 돌아가면서 노동이나 놀이 등 가족 간 유대에 필수적인 시간들이 모조리 증발한다. 생일이나 김장 등 온 가족이 어울려야 할 때도 아이 혼자 독서실에서 가 있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행사치레로 하는 외식이나 여행을 제외하면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시공간을 마련하기는 아주 어렵다. 이런 삶이 계속되면 부모는 부모대로 힘들고 아이는 아이대로 겉돈다. 한 해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다. 이처럼 아이가 가족의 중심에 서면, 삶의 질은 빠르게 떨어진다. 부모의 독서는 아이의 삶에 대한 적당한 무관심을 가져옴으로써 가족을 조금이라도 회복한다. 홍은영씨가 곁을 단다.
“모임에 나와 책을 같이 읽는 건 결혼하면서 멈춘 시간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저 역시 아이가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엄마로서 아이를 도와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하지만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점수보다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건강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자기 시간을 챙기면 아이한테도 자기 시간이 생긴다. 붓다나 예수는 광야로 가고 숲으로 가서 ‘혼자 있는 시간’을 지내는 출가의 결단이야말로 진리로 가는 첫 걸음임을 보여주었다. 책 읽는 일은 일상을 살면서도 맑고 깨끗한 산으로 올라가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는 일이다. 아이의 성취를 빌미 삼지 말고 자신의 삶 자체가 기쁨이 되도록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부모에게 도구가 될 뿐 인격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지연씨가 말을 덧댄다.
“매주 모임에 나오니까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말고 소속감이 생겨서 참 좋아요. 친구랑 둘이서 오래 책모임을 했는데 다소 시들해진 참에, 이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깊이 사람을 사귄 적이 없었는데, 책 마실 나와서 수다 떨고 나들이도 같이 다니면서 정이 아주 깊어졌습니다.”
남편, 자식 얘기를 벗어나게 하는 마법
주부들은 사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롭고 힘들다. 집안일이란 강도는 아주 높은 데 비해 사회적 인정은 극도로 인색한 이상한 종류의 노동이다. 오래 전 여성학자 오한숙희씨가 ‘그래, 우리 수다로 풀자’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어쩌면 수다도 속풀이에 중요하지만, 수다를 위한 만남 자체가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책은 수다의 격을 우아하게, 무엇보다도 풍요하게 해준다. 남편 얘기, 자식 얘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마법의 도구상자다. 루슈디의 ‘하룬과 이야기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 바다 같다. “바다 색깔별로 하나씩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중략) 이야기 바다는 우주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다. 이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액체 상태로 저장되어 변신도 가능하다. 새로운 버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다른 이야기와 합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 바다는 이야기 창고가 아니다. 죽은 게 아니다. 살아 있다.”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상계 숲속작은도서관은 이야기가 물결치는 거대한 바다로 변한다. 이곳은 돌아가면서 시간을 맡아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 명예관장인 김광미씨를 필두로 상경다락방 회원이 주축이다. 일주일에 하루, 아이들을 흙 운동장으로 불러 모아 우리나라 옛놀이를 전수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도록 돕는 일도 한다. 어른들에게 일과 삶의 조화가 중요하듯, 아이들에게도 공부와 놀이의 균형은 중요하다. 김광미씨가 말을 붙인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해도 모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모임 이름을 바꿀까 고민 중입니다. 정이 붙어서 이대로 헤어지면 아쉬움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요. 상경초등학교 학부모로 서로 만났지만 학교나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 왔으니까 더 먼 길을 함께 가도 좋지 않을까요?”
마들역과 수락산역 사이 아파트가 끝없다. 왼쪽으로 멀리 도봉이 배경을 이루고, 오른쪽으로 수락이 우뚝하다. 벌써 서른 해 가까운 오래된 단지라 처음에 생경했을 사람살이가 어느새 포근한 숲과 조화를 이루었다. 자연은 달리 자연이 아니다. 사람이 손대지 않으면 본디 자리에 있던 것처럼 만들기에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자연이라 불린다. 처음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버거워 보여 안쓰러웠던 가느다란 나무들이 어느새 아름드리로 자라서 숲을 이루었다. 가을 드니 은행은 노랗고 단풍은 빨갛다. 햇살을 포근하고 풍경은 아름답다. 책이 벗을 만나고 세월이 쌓여 정이 맺혔으니 이어감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상경다락방이 초등학생 부모에게 권하는 책
초등학생을 둔 부모라면, 아이들 독서에 관심이 많겠지만 먼저 자신을 위한 독서부터 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들은 아이는 물론이고 어른이 읽어도 살아가는 데 많은 영감을 줍니다. 특히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양철북)은 어린이 인권을 다룬 책인데, 아이 키우는 부모라면 무조건 읽으라고 하고 싶습니다. 읽다 보면 지금 내 곁에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걸 알 겁니다. 아이를 존중하는 게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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