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치외교학부 15학번 명형준(20)씨는 수업을 마치면 조용히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졸업 후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계획하고 있어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에 공을 들이는 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계절학기에 서양사도 수강했다. 명씨는 “서울대 학벌로 승부를 보는 시대는 지났다는 생각이 들어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며 “다들 열심히 준비해도 4년 안에 졸업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 1학년 때부터 최소한의 학점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생들도 갈수록 악화하는 청년고용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낭만과 여유로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과거와 달리 입학 때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학업에 매달리고 있는 현상이 뚜렷해진 것.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이 올해 실시한 ‘신입생 설문조사’결과를 10년 전 것과 비교해 보면 이런 분위기는 금세 확인된다.
10년 전 입학한 05학번 2,4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대학생활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질문에 1위 응답은 ‘폭 넓은 인간관계(40.3%)’였다. ‘전공공부 및 학업(31.6%)’은 2위에 그쳤다. 그러나 올해 신입생 3,362명 중 1,32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는 ‘대학생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중복선택 가능)라는 질문에 1위 ‘학업’(65.4%), 2위 ‘폭 넓은 인간관계’(46.8%)로 그 순위가 바뀌었다.
경영학과 05학번 최모(29)씨는 “당시 선배들은 대기업은 쉽게 취업했으며 인기가 높은 유명 컨설팅 회사나 투자은행에도 심심치 않게 합격했다”며 “신입생 때 취업 걱정은 아예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농업경제학과 05학번 권모(29)씨는 “입학 당시 국제봉사나 음악 동아리 등 대인 관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모임 위주로 참여하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며 “만약 지금 신입생으로 입학한다면 10년 전과 달리 학점 관리나 스펙 쌓기에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 취업 준비를 미리 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 자연과학대 신입생은 “주변에 방학을 이용해 중국어나 영어 공부 등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입시 해방감에 마냥 놀고 싶어도 향후 취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최소한의 관리는 누구나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서울대생들도 상당수가 처음 입학할 때 희망했던 직장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졸업예정자 중 1,640명을 대상으로 예정 진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대학원 진학(40.3%)’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일반 기업 취업’(32.4%), ‘전문직 및 기술직 취업’(10.2%) 순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입학했을 무렵인 2009년 신입생 중 2,54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졸업 후 원하는 직장형태를 묻는 질문에 ‘각종 전문직(23.2%)’이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로 ‘연구소 및 대학원(22.1%)’, ‘국가기관(17.7%)’, ‘대기업 및 국영업체’(12.6%) 순이었다. 일반 기업으로의 취직이 당초 희망보다 세 배가량 증가한 것이다.
대학생활문화원장인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매년 교양수업 때 신입생 200여명을 대상으로 가치관을 조사하면 8년 전에는 대인관계나 사랑 등 관계 지향적이었으나 최근에는 진로나 자기계발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며 “점점 어려워지는 취업 환경으로 앞길이 불투명해지는 현실 속에서 일찌감치 돌파구를 찾으려는 세태가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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