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 화장지 안에 있는 종이 튜브로도 집을 지을 수 있어요.”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58)는 10일 서울 한남동에서 열린 ‘헤럴드디자인포럼 2015’의 연사로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그는 종이를 이용해 건물을 짓는 혁신적인 작업으로 유명하다.
반의 혁신적 사고는 재활용과 환경 보호에 대한 책임감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았던 1980년대에 큰 충격을 줬다. 그는 “미국 쿠퍼유니언건축대를 졸업하고 1986년 도쿄에 사무소를 차렸을 때 첫 전시를 준비해야 했는데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 싼 대체품이 어떤 게 있을까 찾았다”며 “사무실에 있는 튜브 모양 종이를 보고 건물 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은 1970년대 미국 건축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아이비리그 출신 5인방 ‘뉴욕 파이브’의 한 사람인 존 헤이덕을 사사했다. ‘집짓기’의 기본을 중시하는 헤이덕의 건축론을 이어받아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3차원의 시’를 지어왔다. 2000년 미국 주간지 타임은 21세기를 이끌 혁신가 100인 중 한 명으로 반을 꼽았다.
건물 안과 밖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건물 밖에서도 내부를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등 서양과 동양의 건축 방식을 결합하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파리를 상징하는 육각형 모양 나무 골조로 만든 프랑스 퐁피두 센터의 분관 퐁피두 메츠 센터도 반 시게루의 대표작이다.
경기 여주의 해슬리 나인브릿지 클럽하우스에서도 반이 설계한 육각형 모양의 나무 골조를 확인할 수 있다. 반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 가옥은 밖에서도 내부를 다 볼 수 있고 내부와 외부가 연결돼 있다”며 “전통 일본 가옥에 살면서 유연성과 개방성이 좋아 그걸 커튼월 하우스(벽을 커튼처럼 완전히 제칠 수 있게 만든 집)에 적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반은 대형 건축물뿐 아니라 지난 20여년 간 세계 곳곳의 재난지역을 다니며 종이와 플라스틱 등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활용 재료로 난민 대피소를 지어왔다. 이 작업을 시작한 건 1994년 르완다 내전 때부터다. 유엔 피난처가 좋지 않아 추위에 떠는 이들을 보고 그는 충격을 받았다. “난민들이 나무를 잘라 천막을 만들다 보니 산림황폐화가 문제가 됐습니다. 그래서 알루미늄 파이프를 제공했더니 이걸 쓰지 않고 팔아버리고 계속 나무를 잘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위스 가구 브랜드 비트라의 도움을 받아 종이 튜브와 플라스틱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이후 그는 “정부와 비정부기구(NGO)의 도움이 닿지 않는 소외 받는 소수를 먼저 돕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지키고 있다. 시리아 난민보다 네팔 대지진 피해자를 우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리아 난민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몇 번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시리아 사태는 정치적인 것이고 그건 유엔과 관련 국가들이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자연재해로 피해를 본 소수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종이로 집을 짓는다면 화재 방지와 단열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진다. 반은 “방수, 방화, 단열이 되도록 산업적으로 처리한 종이가 있기 때문에 안전 규정에 맞게 짓기만 하면 콘크리트를 쓰든 종이를 쓰든 문제가 없다”며 “건축 승인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종이는 약하다는 편견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터키 지진 이후 현지 주민들이 벽돌보다 종이 건축물에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해 나도 놀랐다”며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도 콘크리트보다 종이가 확실히 더 안전하다”고 덧붙였다.
반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디자인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고 정의했다. 현지 상황, 기후, 경제, 종교 등 모든 맥락을 이해한 뒤 디자인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한다는 것이다. 네팔 지진 뒤 현지에서 구한 나무로 골격을 짜고 그 속에 깨진 돌을 채워 넣어 집을 지은 것이 좋은 사례다. 그는 1995년 고베 대지진, 1999년 터키 이즈미트 지진,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등 자연재해가 있는 곳이면 달려가 종이, 맥주 박스, 벽돌 등 현지 조달 가능한 재료로 집을 지었다.
이런 현장에서 건축가로서 책임감을 통감하는 이유는 무너져 내려 사람을 덮친 건물을 지은 건 사실상 건축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건축가란 직업에 많이 실망했습니다. 특권층을 위해 일하는 것 같아서요.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과 부를 건축가를 고용해 보여주려 합니다. 특권층을 위해서만 집을 짓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도 돈을 좋아하지만 균형이 중요합니다. 자원부족과 환경오염도 고민해야 합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낭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사랑하는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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