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서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독립 서점가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나온다. 무명의 저자, 홍보ㆍ마케팅 전무, 인터넷 구매 불가…. 온갖 악조건 가운데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는 힘은 딱 하나, 책의 내용이다.
혼자 쓰고 디자인하고 출판까지 도맡은 엄지용(28)씨의 시집 ‘시다발’은 지난해 말 출간 이후 올해 10월 5쇄까지 찍으며 조용히 독립 서점가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까지 팔린 부수는 약 1,400부. 이 정도면 대형 출판사의 시집 1쇄 판매 부수와 맞먹는다. ‘시다발’에 실린 시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소위 ‘SNS 시’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최근 두 번째 시집 ‘스타리 스타리 나잇’을 펴낸 엄씨를 지난달 말 용산구 독립서점 ‘스토리지 북앤필름’의 별채에서 만났다. 서점에서 하는 릴레이 강연의 강사로 나선 그는 이날 시 쓰는 법이 아닌 독립출판 노하우에 대해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시집을 내는 게 꿈이었는데 대략 시기를 마흔쯤으로 잡고 있었어요. 그 나이 되면 책을 출판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독립출판을 모르던 시기의 이야기죠.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바로 시집을 냈습니다.”
광고홍보학과를 나와 관련 회사에서 일하던 엄씨는 한 달여 전 직장을 그만뒀다. 시집이 히트를 쳤으니 전업 시인이 되려는가 하는 예상과 달리 그는 이직을 준비 중이다. 한 번도 등단을 시도한 적 없다는 그는 “시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시를 쓰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느낀 소소한 감상들을 메모지, 휴대전화, 휴지 같은 데 무작위로 써놔요. 시집을 내려던 것도 메모해둔 게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책으로 묶어 두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엄씨의 글은 짧고 가볍고 위트 있다. “퇴근하고 싶다. 비록 아직 출근 전이지만” 같은 글은 출근길 지옥철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을 실없이 비식거리게 만든다. ‘영화’라는 시는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순간을 그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8월엔 한 모델이 자신의 SNS에 이 시를 올려 ‘시다발’ 판매에 크게 일조했다.
“너와 영화를 보러가면/나는 종종 스크린 대신 너를 보곤 했다//영화를 보는 너를 바라봤다//즐거운 장면을 보는 너는 어떤지/슬픈 장면을 보는 너는 어떤지/너는 매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그렇게 너를 바라보곤 했다//그러다/너와 눈이 마주칠 때면/내겐 그순간이 영화였다”
‘시다발’의 짤막한 글들은 지금 대중이 문학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짧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일본의 원로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포엠(시 작품)의 시대는 끝났지만 포에지(시상)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는 것 같다”며 게임, 웹툰, 애니메이션 등 다른 문화 분야에서 포에지가 얇고 가느다란 형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시가 작품집이란 정해진 포맷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와 함량으로 다가올 때 대중과 만나는 지점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다발’은 그 중 하나다.
엄씨는 “어려운 해석을 요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이라며 “쓰는 사람이 시라고 생각하고 쓰면,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가 생각하는 시는 생각의 문 같은 거예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 어떤 시는 지난 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어떤 시대는 시대의 아픔을 향해 열려 있죠. 문을 통과한 후 펼쳐지는 세계는 독자의 몫이고요.”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