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맑은 밀양에서 일제히 ‘스타트’한 7개팀의 각 선수는 경남도계선에 산재해 있는 험한 산길의 자갈길을 선두로 다투면서 죽도록 뛴 끝에 6.25사변 당시 낙동강 전투 지역의 방어도시였던 대구에 ‘꼴인’하였다…(중략) ‘컨디숀’은 극히 좋았으나 심한 자갈길에서 큰돌은 비키고 작은돌은 그냥 밟고 일사분란으로 뛰느라 발바닥이 부르트는 형편으로 내일의 경기를 우려케할 정도였다”-본보 1956년 11월 15일자
‘한반도 통일 대역전경주대회: 한라에서 백두까지(구 부산~서울 대역전경주대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5년 11월 14일 첫 출발 총 성을 울린 지 61년 만이다. 육상계는 역전마라톤을 두고 ‘한국 마라톤의 문화재’라고 입을 모은다. 하나의 대회가 이처럼 긴 세월 동안 역사와 정통성을 지켜온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서울을 릴레이로 뛰겠다는 당시 발상은 획기적이었다. 당시 비포장도로는 예삿일이고 도로 곳곳이 끊긴 곳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1회 대회는 육군특무부대, 해병대, 서울시청, 경남팀이 참가해 490.5km를 뛰었는데, 선수들은 험한 길을 달리느라 해진 운동화 밑창에 자동차 타이어 고무를 잘라 붙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국민들의 응원도 열렬했다. 축제라는 것이 드물었던 시절 역전마라톤은 국민들에게 축제이자 동시에 낯선 스포츠 관람이었다. 배고프고 춥던 시절, 강풍을 뚫고 달려가는 철각들의 모습은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1956년 11월 19일 보도에서도 “젊은 투사’들인 선수들은 아무런 피로의 빛도 보이지 않고 있음이 더욱 관중들로 하여금 마음 든든케 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지방 나들이가 흔치 않은 시절 역전마라톤 보도는 전국 방방곡곡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6년 11월 16일 관련 보도에서는 6.25전쟁 당시 최후의 피난지였던 부산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본보는 “집들이 들어서서 머지 않아 산꼭지까지 시가지가 될 상 싶다. 비좁은 거리에는 서울에 못지 않은 인파로 잡도를 이루고 잇으며 더욱이 국제시장은 사치품을 비롯한 온갖 제품이 산적해 있어 밀무역의 본거지로의 면목이 뚜렷하다. 또한 큰 화재가 연달아 일어난 부산에는 무슨 뜻에서인지 대화(大火)라고 하는 이름의 다방까지 출현하였으며 이와 같은 환경 아래 이곳 여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저고리로 화려한 복장들이다”라고 전했다. 경부역전마라톤은 올해 처음으로 출발선을 부산에서 제주로 변경했다. 1995년 대회를 창설할 때 만들어졌던 통일의 염원을 제주에서부터 북녘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