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헌의 구례일기 32] 새 트럭을 어디 쓸꼬
5년 숙원이던 트럭 드디어 장만
삐져 나온 스펀지ㆍ13년 된 엔진 소리
눈귀에 거슬려도 내겐 리무진
방금 전 안개 자욱한 초겨울이었는데 세상이 환해진다. 해가 허공에 달처럼 나타나더니 물기는 죄다 빨아먹고 금새 내 몸만 적신다. 그러다가 산성봉 너머로 해 떨어지면 그늘 닿은 지 10분도 안 돼 또 ‘을씨년’이 찾아올 것이 뻔하다. 딱 양은냄비다. 내 맘이 그런 건지, 날씨가 그런 건지.
작년에 간전댁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여름에 벌레 많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모기가 그랬단다. “모구 댕긴다고 해싸도 우리가 없으면 느그 새끼들은 벌 볶아서 주왕에 찌끄러 논 거 맹키로 벌벌 떨거이여.” 자기네 모기들 욕하지만 조금 추워져서 모기가 없어지면 불에 덴 벌들 쪼그라지듯이 부엌 불 앞에 앉아 벌벌 떨며 추워할 거라는 얘기다. 딱 요맘때가 그렇다. 농막 난로에 불을 지필까 말까 수 차례 뜨겁게 고민하다 벌벌 떨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작년보다 업그레이드 된 것이 있어 좋다. 5년 숙원이던 트럭을 장만했다. 며칠 전까지 농장으로 가는 길이면 오토바이 위에서 첩보작전 모스부호 보내 듯 아래윗니를 부딪치며 가야 했는데 이젠 다르다. 안락의자 부럽지 않은 운전석에 앉아 달콤하고 잔잔한 가을 음악 들으며 보란 듯이 안개를 뚫는다. 농장에 도착해 살짝 엉덩이 들이밀 듯 조심스레 후진해서 안착을 알리듯 주차브레이크 쫙 당겨주니, 꼬리 흔들며 반가워하는 희동이가 오늘따라 진돗개 스러워 보인다. 물론 13년 된 엔진이 선율을 방해하기도 하고, 운전석 시트에서 터져 나온 스펀지가 거슬리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과분 덩어리다. 50cc 스쿠터에서 100cc 오토바이로 올라탔을 때도 그렇게 좋았는데, 갑자기 3,000cc 리무진에 올랐으니 말해 뭐하랴.
논 네 귀퉁이 안방 크기만큼
콤바인 틀 수 있게 낫으로 베어 놔야
친구는 나락 70포대 장담했지만
결국 50개로 끝나
그래도 작년 42개보다는 나아졌네
트럭도 생겼겠다 창고도 정리했겠다, 이제 나락만 갖다 쌓으면 된다. 콤바인(벼를 베서 낟알을 터는 일까지 한 번에 해주는 기계) 작업을 해 줄 S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슬 걷히면 바로 시작 허세이. 근디 왜 이렇게 씩씩거리면서 전화를 받는 당가. 뭐이 바쁜가?” 10시는 지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벼 베는 일은 기계가 하지만, 그 기계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서는 사람의 ‘시다바리’가 필요하다. 논의 귀퉁이에서 콤바인이 쉽게 방향전환할 수 있도록 미리 네 귀퉁이에 안방크기만큼씩 낫으로 벼를 베어 놓아야 한다. 그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아 숨이 찼던 거다. 쪼그리고 허리 굽히는 모든 일은 신체 특성상 아직도 혈류장애를 일으키거나 호흡곤란을 가져 오곤 한다.
“올해도 암것두 안 쳤는가. 인증 받았다구 했쟈? 작년보다는 훨 나은 거 맹키로 보이는구마.” 형님은 별 대답 없어도 혼자 얘기 잘 하는 스타일이다. 일단 술 한잔 하고 시작하는 습관에 맞춰 맥주와 마른안주를 펼쳤다. 도시 사람들 생각엔 시골에선 다 막걸리만 먹고 사는 줄 알지만, 내가 이곳에 내려왔을 때 이미 맥주로 통일돼 있었다. 막걸리는 배만 부르게 한다며 막을 내린 지 오래였다. 지난해 수확이 워낙 모자랐던 탓에 그걸 기억하는 형님이 듣기 좋은 소리로 시작했다.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서 나락 담을 포대도 새것으로 한 20장 더 구입해 놨다.
모 심는 속도와 벼 베는 속도는 거의 비슷하다. 3,000제곱미터 논 한 단지 작업하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물론 아무 문제가 없을 때만 그렇다. 이앙기가 물구덩이에 빠져 온 동네 청년이 다 동원된 적도 있고, 벼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콤바인 세워 놓고 낫으로 벤 적도 있다. 작업을 지켜보며 걱정하는 게 1이고 문제가 생겨 몸이 힘든 게 10이라면 맘 아픈 건 100도 넘는다. 겸연쩍어 겉으로는 웃어 보여도 속으론 통곡을 하게 된다.
모내기와 벼 베기 작업 모두 아무런 문제 없이 끝낸 게 처음이다. “몇 해 농사 짓다 보면 다 제대로 잡히게 돼 있응게 너무 걱정 마시게.” 처음 벼 농사를 시작했을 때였다. 수평이 맞지 않아 풀도 많이 자라고, 여기저기 물도 많이 새어나가고, 논두렁은 허물어져가고, 얼굴 윤곽이 없어질 정도로 걱정이 들어찼을 때,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같이 해주시던 말씀이다. 속으로는 ‘그게 도대체 언제냐구요. 몇 해가 정확히 몇 년을 말씀하시는 거냐구요!’ 답답해했지만 어느덧 그 때가 됐나 보다. 올해가 다 제대로 잡히게 된 첫 해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온 나라가 가뭄이라고 기우제라도 지낼 판이지만 내 속은 달랐다. 비가 오긴 와야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나락 말려야 할 때 비가 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별 수 없이 형님네 건조기에 넣기로 했다. “45도루 해주세요 네?” 어거지를 부렸다. 정부가 매상하는 벼는 급한 사정에 60℃ 고온에 말리지만 그러고 나면 미질이 나빠지고 밥 맛도 떨어진다. 정미소에 물어보니 50℃ 이하로만 하면 널어 말린 것 보다 낫다고 했다. 온도를 낮춰 건조시키면 그만큼 오래 기계를 돌려야 하고 시간으로나 연료로나 기계 임자는 손해다. 그래서 떼를 썼고 형님은 들어주셨다.
다음날 아침, 혹시나 하는 마음과 달리 여지 없이 비가 내렸다. 야속한 하늘 바라보던 7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쌀 빼!” 트럭을 몰고 내려갔다. 걸레로 짐칸 물기를 닦아내고 부직포를 깔며 부산하게 나락 실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장하는 친구가 수건을 뒤집어 쓰고 나타났다. “왠 일이래?” 전화도 안 했는데 도와준다고 튀어왔다. “올핸 몇 포대나 나오나 함 세 볼라구.” 키득거리며 나락포대를 어깨에 짊어졌다. 작년 수확량이 워낙 적었던 것을 기억하고 하는 말이다. “걱정 말어! 70개는 나올 테니까. 자네 트럭에도 실어야 하니까 준비해 둬!” 결국 50개로 나락은 끝이 났고, 친구 트럭은 필요 없었다. 그나마 작년 42개보다 나으니 다행이다.
순익 따져보니 평당 3000원 남짓
생난리 쳐 가며 그냥 바보짓 했네
오줌 누고 지퍼도 못 올리는 가을
머리띠에 트럭 몰고 여의도 가 볼까
비가 계속 내려 움직일 수도 없었고 S형님은 저장고에서 맥주와 단감을 꺼냈다. 낫을 들더니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 컵을 만들어 맥주를 나눠 마셨다. 콤바인과 건조기 사용비를 확인하고 내친김에 벼농사에 들어간 비용과 예상매출, 순이익을 계산했다. 얼추 따져보니 3.3제곱미터(평)당 3,000원 남짓. 그나마 인건비와 운송비용, 종자 값은 생각도 안 한 결과다. 금리가 바닥이라지만 그 중 수익률 좋다는 금융상품에 논 값을 집어넣어 보면 대강 비슷한 수익이 나온다. 즉, 누구한테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생기는 돈을 누구는 생 난리를 쳐가며 겨우 만들어 낸다는 얘기다. 앞뒤 잴 것도 없다. 그냥 바보 같은 짓이다.
이장 친구와 창고에 나락포대를 다 쌓아놓고 뿌듯함도 같이 내려 놓았다. 친구가 새참도 마다하고 감자 비닐하우스로 가는 바람에 나도 바로 농장으로 향했다. 길가엔 “개 사료값 만도 못한 쌀값...가자! 서울로” 같은 플래카드가 끈 한 쪽이 떨어진 채 흔들리고 있었다. ‘서울 갈 새가 어딨나. 단풍철이라고 코 앞에 있는 피아골도 못 가는데...’ 생각하며 농장에 도착했다. 콩 수확도 절반 이상 남았고, 꺾어 둔 들깨는 바짝 말랐는데 털지도 못하고 있다. 울타리 콩은 곧 터져나갈 듯 매실나무에 걸려 손을 기다리고, 양파 모종은 두둑 위에 몇 개 꽂히다 말았다.
양파는 정말 열심히 심어도 진도가 안 나간다. 반나절 동안 한 두둑 심어보니 6개씩 75줄이면 450개, 두둑이 5개니 2,000개를 넘게 심어야 한다. 괜히 계산했다. ‘뭘 먼저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물이나 마시기로 했다. 술 마시고 물 마시고 쌀쌀하니 아랫도리에서 급하다는 소식이 왔다. 보일러처럼 덥힌 물을 빼야 하니 또 추워지겠다 아까워하며 돼지감자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모아 준비 하려는데 지퍼가 내려가 있다. ‘오토매틱인가?’ 생각하니 아까 창고 옆에서 한 번 내렸던 생각이 났다. “가실(가을)일 할 때는 오줌 누고 골마리(허리춤)도 못 추켜 올린답디다” 하시던 간전댁할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허리춤이야 복잡하다지만 지퍼도 제대로 못 올리는 가을이다.
대충 추스르고 장갑 끼는데 트럭이 한 대가 들어왔다. D동생이다. “형님. 항아리 가져 왔어라.” 어제 저녁에 감식초 담을 항아리가 필요해 여분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알아 보겠다구 하고선 대뜸 싣고 왔다. “씻어 놨던 것잉게 볏짚 태워서 소독하고 그냥 쓰시면 될 겁니다 형님” 두 말 들이 항아리를 3개나 실어왔다. “나락은 다 쟁였는게라? 몇 개나 나왔는가요?” 쓰게 웃으며 대답했더니 “흐미, 짠한거. 넘들 반짝보다 그야말로 쪼끔 더 나온 거 아니래요. 어쨌든 애쓰셨소 형님. 세상에 없는 쌀 잉게 묵는 사람들 그거나 알고 묵으라고 허세요.” 짧은 몇 마디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세.” 하는데 장씨아저씨 차가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온다. “탕 한 그릇 하러 가시죠.” 차에서 내리던 아저씨도 반기신다. “그래 가자. 탕이든 국밥이든 묵고 싶은 거 묵자.”
밥 먹으며 이러 저런 얘기하다가 쌀값 얘기도 나오고 정부 지원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안 좋은 방법으로 지원금 받고 제대로 농사 짓지도 않는 사람들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얼마 전에 국민권익위원회에서 근무하는 후배가 내려와 지원금 오용 사례를 조사한다던 기억이 나서 신고하면 된다고 했더니 두 사람 다 반응이 비슷하다. “확 꼰질러 버리면 속이 시원 하겄는디, 그라믄 그 사람 처자식은 어찌 된당가” 식이다. D동생도 말을 이었다. “지가요 맘이 약해요. 남 잘못되는 걸 못 본당게요. 맘이 약해서 요로코롬 허우대 훤한디도 아직 여자도 못 만나고 장개도 못가고...” 아저씨가 “이봐. 이런 데서 ‘지가 맘이 약해요’ 하는 것은 ‘지가 바보예요’ 하는 소리여.” “그것이 아니지라. 지는 그냥 한국적 정서가 몸에 확 들어 앉아서...” “웃기는 소리 말어. 쌀값이 30년째 그대론데 아무 말 못하고 살잖어. 다 맘 약한 바보라서 그런겨. 이 국밥 값은 얼매가 올랐는가. 왜 암것두 못하고 내놓으라는 값에 쌀을 내놔야 하나 말이여!”
겸연쩍어하던 D가 슬그머니 화제를 바꿨다. “형님. 트럭은 잘 나가제라?” “잘 나가지. 쌩쌩해.” “그라믄 형님 트럭 타고 서울 한번 안 가실라요?” “서울은 왜?” “아 담주에 다덜 서울 간다고 하잖애요. 우리두 함 가죠 뭐. 쌔차 타고요 잉?” 동생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매년 여의도에서 모이던 사람들. 죽기 살기로 소리지르던 사람들. 겉에서 빙빙 돌며 바라보기만 했던 그 사람들 틈에 내가 낀 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콩은 어떡하고, 들깨는 언제 털고, 감식초는...’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가자 까이꺼. 트럭 몰고 서울 가자!”
참 대책 없는 가을이다.
前 한국일보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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